책의 내용은 제목만큼이나 직관적이고 간단하다. 닐 부어맨이라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한때 이벤트 프로모터이자 패션잡지의 편집장이었으며, 스스로를 브랜드 중독자라 칭할 정도로 브랜드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는데, 그러던 어느 날 존 버거(John Berger)의 '사물을 보는 시각(Ways of Seeing)' 이라는 책을 읽고 일생 일대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책을 각성의 계기로 삼았다는 점에서 책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끼는 바이다) 그 내용은 광고의 폐해에 관한 것으로, 그는 자신이 왜 많은 돈과 시간을 광고 속 삶이라는 허망한 목표에 낭비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그래, 내가 가진 모든 브랜드 제품을 태워버려야겠어!' 그의 결심은 브랜드 화형식이라는 구체적인 행동 설정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브랜드의 어원은 스칸디나비아 고어로 '불로 지진다'는 뜻의 '브랜드르(Brandr)'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브랜드가 우리 삶에 끼쳐 온 막대한 영향력을 생각해 볼 때, 우리 모두는 가히 불로 지진 낙인 하나씩을 몸에 달고 사는 것 같다. 브랜드가 상품이고 서비스며 기업이고 심지어는 사람이기까지 한 이 시대에서, 브랜드 없이 살아가기란 아마도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 극명한 예로, 한때 넷상에서 '이영애의 하루' 라는 제목으로 나돌던 유머 하나를 들어 보자. 그녀는 자이 아파트에 산다. 아침에 일어나 세이 비누로 세수를 하고, 엘라스틴으로 머리를 감고, 웅진 코웨이 정수기로 물을 마시고, 지펠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 먹는다. "나의 꿈도 소중해" 하면서 영어공부를 하던 그녀, 본격적인 쇼핑에 나서 엘지 카드를 꺼내고 당당히 아이오페 화장품을 산다. 이후 집으로 돌아와, 휘센 에어컨을 쐬며 엑스캔버스 TV로 자신이 나온 CF를 보는 것이다.

이 웃지 못할 유머에 마음 한 켠이 허해지는 것은, 비단 브랜드가 가지는 영향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브랜드가 곧 나 자신의 가치를 결정짓는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쓰레기보다 못한 푸마 운동화를 신고 있군. 매력없는 여자야.' (p70 참조) 그녀는 푸마를 신었다는 이유로 단 몇 초만에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런 그녀가 루이비통 핸드백을 들고 있다면 어떨까? 그녀에 대한 평가를 한번쯤 재고해 보게 될 것이다. '아니, 저건 모 배우가 애용한다는 핸드백이잖아! 시장에서 산 위조품이 아닐까? 그녀는 어쩌면 단지 패션 센스가 조금 부족한 돈 많은 여성일지도...' (p182 참조) 브랜드의 맹점이 또한 바로 여기에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개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자기 표현의 방식이 광고 속 누군가를 닮고자 하는 규격화된 욕망과 직결될 뿐이라는 얘기다.

또한 브랜드는 베블런이 말한 '과시적 소비'의 한 형태에서부터 출발해, 소비층을 분화시킴으로써 부담을 가중하는 허상이 존재한다. 명품의 경우 제품 본연의 가치와 서비스를 감안한 비용의 수십 수백 배가 프리미엄으로 붙는데, 그 돈이 거리낌없이 지불되는 이유도 바로 '과시할 만큼의 개성'을 사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랜드 마케팅이 제품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포장해서 어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때, 과시적 소비자는 결국 내실보다는 허울뿐인 경우가 많으며, 각각의 브랜드 또한 '이 제품이 이 정도의 가치를 담고 있다'라는 일련의 보증에 불과하다. 물론 그것이 주는 (아마도 신뢰성을 담보로 한) 편의의 측면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브랜드에 예속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모두 '브랜드화'된 사고방식으로 타인을 저울질하고 평가해야 하는 재앙이 지속될 것이다.

그 때문일까. 닐 부어맨은 브랜드의 어원 자체를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자신이 가진 모든 브랜드 제품들을 불사르기에 이른다. 그는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주변의 수많은 질타를 감내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야 했다. 브랜드 제품을 대체할 '브랜드 없는 제품'을 찾아야 했고 그것을 대체하기 힘든 경우 스스로 만들어내야 했으며 (가령 치약 같은) 어떤 경우에는 브랜드 제품보다 브랜드 없는 제품을 쓰는 데에 더 많은 비용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도심 속의 원시인과도 같아서,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나는 앞으로 그가 '브랜드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으며, 그를 하나의 '브랜드'로 모델삼아 따라 살아가고 싶은 마음 또한 전혀 없다. 그가 지향하는 삶의 목적성은 존중하지만 브랜드 화형식에 대해 찬동하고 싶지도 않다. 그것은 '극단적 반소비주의'의 형식으로 표출되었으며, 되려 많은 이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으므로 애당초 실패한 혁명인 것이다. 이는 화형식이 끝나고 난 뒤 관중들의 태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브랜드에서 해방되었다는 그 자신의 뿌듯함과는 별개로, '조금이라도 멀쩡하게 남아 있는 브랜드 제품을 손에 넣기 위해' 우르르 벌떼같이 달려드는 관중의 마음까지는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재로 화한 브랜드와의 삶은, 그에게서 그것을 지켜보던 관중들에게로 다만 이양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인의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파급 효과가 큰 사회적 메시지를 함유했고, 그로 말미암아 많은 독자들이 한번쯤 되돌아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의의가 있다. 브랜드를 중심으로 소비지향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써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바람이 차가운 저녁, 에쿠니 가오리의「홀리 가든」을 읽으며 창 밖을 바라본다. 텅 빈 거리는 적막감만 감돌 뿐 그 어느 누구도 없어, 굉장히 정적이고 드라이한 풍경을 자아낸다. 그나마 이따금씩 보이는 변화라고는 신호등이 눈을 꿈뻑거리며 바람개비 차들의 발걸음을 멈춰보려 애쓰는 것인데, 나는 그것이 안쓰러워 홀로 헛헛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지 않은가. 저 신호등은 다음, 그 다음에도 얼마든지 또다른 만남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인데, 알면서도 외롭다. 언제나 외롭게 서서 운다. 꿈뻑, 꿈뻑, 꿈뻑.

비단 신호등 뿐만 아니라 헐벗은 가로수나 바스러진 낙엽 따위를 보며 내가 고독을 느끼는 것은, 침묵의 시간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별은 고요히 다가와 감내할 만큼의 시간을 툭, 하니 던져주고 간다. 잠깐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눈을 꿈뻑거려 보라는 뜻일 게다. 그러나 기다림을 모르는 자들에게 이별이란 그저 잘못된 만남, 혹은 불운한 죄의 삯일 터, 나 또한 어찌할 바 모르고 외롭게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으며 더욱 아팠다. 소설 속 가호의 5년전 실연도 그러했겠지.

실연의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호의 모습은 여러가지 모습으로 투영된다. 파란 장미무늬 홍차 잔을 깨뜨린 후부터 제 인생의 조각이 깨졌다고 믿는 그녀. 화려한 안경을 쓰면 살풍경한 세상이 조금은 달리 보일 거라 자기 최면을 거는 그녀. 곁에 자신을 바라봐 주는 나카노가 있지만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져서라도 그의 마음을 애써 외면하고픈 그녀. 그런 그녀가 거울을 바라보며 내뱉는 한 마디는 가슴을 후빈다.

- 아아, 설탕 덩어리가 미지근한 물 속에서 녹는 것처럼 눈물겹구나.

그 어디에도 동화되지 못한다는 것만큼 눈물겨운 일이 또 있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댄다 해서, 남아 있는 빈 자리가 온전히 채워질 수 있을까. 가호 뿐만 아니라 유부남과 불륜을 하는 시즈에도, 가호를 바라보는 나카노도, 그밖의 모든 등장인물들도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공허와 불안을 안고 제 사랑에 목매달고 있는지를 안다. 얼마나 더 아파해야 할 지 알고, 언젠가 곧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끝을 맺으리라는 것도 안다. 심지어 그 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는 것까지.

그러나 결국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사랑을 아는 자라면, 그리하여 침묵의 시간을 기다림으로 채워낼 수 있는 자라면, 까짓거 알면서도 바보가 될 만한 가치 또한 충분하지 않겠는가. 지나간 사랑을 표방했던 가호여도 좋다. 현재의 사랑을 이야기한 시즈에, 앞으로의 사랑을 꿈꾸는 나카노여도 좋다. 내가 품고 있는 사랑이 무엇이든, 우선적으로 나는 제각기 다른 사랑의 가치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상념에 잠겨본 것도 오랫만이다. 무미건조하게만 느껴지던 일상 속에 버뜩 정신이 드는 것은 그들 대화가 나 자신을 향해 있음이다. 평소 같았으면 우울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었을 법도 하련만, 어찌된 일인지 나는 마음이 더더욱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훅, 하고 불면 곧 날아갈 것만 같은 연약한 인생, 상처입은 영혼의 바람개비 같은 인생에도 사랑의 전조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