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해-」- 패닉, '달팽이'

「내가 가는 이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수 없지만 오늘도 난 걸어가고 있네 」- 윤도현, '길'

길다. 길어서 길인가 보다. 잿빛 도시는 오늘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분주히 길을 닦아내느라 여념이 없다. 몇 대의 차가 연이어 휙휙 바람을 갈랐고 그 틈으로 소리가 열렸다. 신호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둘씩 길을 만들기 시작한다. 미니스커트 차림의 한 여자는 제 구두소리에 맞춰 또각또각 아스팔트를 포장하고, 길섶의 나그네는 잡초가 듬성듬성 자란 도랑을 잇는다. 리어카를 끄는 아저씨는 구슬땀으로 오르막길을 빚고 개구쟁이 사내들은 올망졸망 골목길을 엮어낸다. 비탈진 사잇길로는 비밀스런 쥐구멍을 파냈고 심지어는 어두컴컴한 땅 밑과 하늘, 바다, 우주에까지 길을 열었다. 그러다 보니 이 길에서 저 길로, 저 길에서 이 길로, 길은 어느새 보이지 않는 실타래처럼 얽히고 섥혀 버렸다. 이를 어쩌나. 사람들은 이제 길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고아 신세가 됐다. 길에서 태어난 인간은 천상 길에 예속되기를 열망할 수밖에 없나니, 이 욕망을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환기시켜야 할까. 애당초 해답은 존재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모세는 바닷길을 열었고 도로시는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길은 바람이 내뿜는 숨결에 따라 이야기를 사방으로 흩어내고, 인생을 순환시키는 공간이 된 것이다. 그러나 방금 전에 말했듯이, 길은 욕망 이상의 것이 될 수 없었다. - 결코 머무를 수 없기 때문에 - 그것이 길이 욕망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내포하는 이유다.

<바람의 도시>와 <야시>의 미장센은 '길'이다. 새빨간 표지부터 눈'길'을 끄는 이 책의 두 단편은, 모두 그 머무를 수 없는 욕망의 분출구를 밀도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꽤나 유혹적이고 환상적인 공간으로 다가오게 하는데,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는 <야시>의 부제가 이를 간접적으로 설명해 준다.

- 일단 발을 들이면,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 같은 환상의 공간. 그 세계와 연결된 자들의 슬픈 운명이 당신을 기다린다. 길은 교차하고 계속 갈라져 나간다. 나는 영원한 미아처럼 혼자 걷고 있다. 나뿐만이 아니다. 누구나 끝없는 미로 한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풍경을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아침은 없어. 기억하고 있어. 그때도 처음에는 아침을 기다렸어. 하지만 아침은 오지 않았어. 물건을 사지 않는 한, 야시는 한없이 계속되는 거야. 여기에서는 바깥 세계의 시간이 흐르지 않아." - 프롤로그 中

<야시(夜市)>는 말 그대로 밤시장이지만, 그냥 밤시장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열릴지 모르고 일단 한번 들어가면 하나라도 물건을 구입해야 나올수 있는, 기묘한 공간이다. 더욱이 야시의 길에서는 물건을 파는 사람이나, 파는 물건들도 하나같이 독특하다. 영구방랑자는 1억엔짜리 돌을 팔고, 외눈박이 고릴라는 영웅의 검을 팔고, 달걀귀신은 노화가 진행되는 약을 팔기도 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 어느 것도 사지 못하고 부유하다가, 결국 그 스스로가 길이 되는 운명을 택한다. <바람의 도시>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어렸을 적 우연찮게 발견했던 산 울타리를 기억하고는, 호기심에 친구와 함께 그 너머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곳은 요괴들이 나돌고 죽은 자가 나무가 되는 방랑자의 고도. 도중에 친구가 죽고, 다시 친구를 살리기 위한 여정을 떠나는 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야시>의 시장과 <바람의 도시>의 고도가 보여주는 길은 분명 우리에게는 '닫힌 길'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열린 길'이라 말할 수 있겠다. 물론 닫힌 길에 발을 들여놓은 데에 대한 희생이 뒤따르지만,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길에서 벗어나는 자들이 존재하기에, 또다른 길이 열릴 소지는 계속 남아있는 것이다.

상상하는 일은 언제나 재미있다. 일본소

용의자 X의 헌신. 제목부터 뭔가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가? 올해 나오키상을 수상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수작이다. 히로스에 료코가 나오는 영화 '비밀'을 본 사람이라면 조금 더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수월할 지도 모르겠다. 그는 동명의 원작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았으며 데뷔작인 '방과후'로 에도가와란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변신', '환야'와 같은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가히 미스테리 소설의 대가라 불릴만한 이력의 작가이다. 그렇다면 내용은 어떤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만족스럽다. 캐릭터들은 구성을 위해 알맞은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각기 매력적이다. 이야기의 맥은 들쑥날쑥하지 않고 적당한 긴장감이 유지되고 있으며, 조잡하거나 식상한 느낌이 전혀 없다. 시종일관 독자를 책에서 눈을 뗄수 없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도의인 '재미'를 확실히 보장한다. 본래 사람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린 책은 그만큼 신뢰도와 기대감이 높고 그에 따라 실망도 큰 법인데,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다. 굳이 옥의 티를 집어내자면 간간히 보이는 오탈자 정도랄까.

나는 영화를 볼 때도 반전이 있는 스릴러물을 아주 좋아한다. SF나 판타지도 좋다. 상상력을 배가시키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다. 교묘하게 짜여진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어가는 재미, 생각지도 못했던 트릭들을 마주했을 때의 짜릿함, 다 맞추었을 때의 그 뿌듯함. 그것은 직접 느껴본 사람만이 알 것이리라.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용의자 X의 마지막 반전이 나올 때까지도 그것을 절대 예상하지 못했다. 원체 두뇌회전이 둔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 몰입하여 다른 생각할 틈이 없었던 것인지. 혹자는 예상 가능한 반전이 되려 아쉬웠다 얘기하지만, 글쎄, 아무래도 좋다. 이 작품의 가장 주목해야할 포인트는 '반전' 이 아니라 '헌신'에 있음이라.

사랑 이야기다. 제목을 달리 좀더 덧붙였다면, '용의자 X의 헌신적인 사랑'이라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 처음부터 살인사건은 순식간에 진행되고, 용의자는 아예 대놓고 나오기에 의아했었다. 진짜 용의자는 다른 사람일까. 살인에 뭔가 트릭이 있나. 갖가지 추리를 하려 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의문은 다른 쪽으로 옮아갔다. 이 책을 읽은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주목해야할 것은 '용의자 X'가 아니라 '헌신'에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헌신을 이야기하려 한 것일까. 헌신이란 과연 무엇일까. 말 그대로 온몸을 다 바칠 수 있는 용기? 헌신은 그 이상의 것이 아닐까. 헌신에 대한 재정의가 내려지는 순간이었다. 용의자의 헌신이 단순히 모든것을 바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사랑, 사랑이다. 사랑할 수 있었기에 용의자 X던 Y던 아무래도 좋았지 않았을까. 두근두근거렸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오히려 미궁의 사건으로 끝났으면 하는 안타까움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도시락 가게에서 일하며 모두에게 좋은 사람인 야스코와 딸 미사토, 그녀의 전 남편이자 살인사건의 피해자 도미가시, 그리고 옆집 남자 이시가미. 이 넷을 축으로 이야기는 시작되고 구사나기와 유가와 등의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사건은 복잡하게 얽혀가기 시작한다. (스포일은 죄악이다. 이미 눈치가 빠른 이들은 나름의 상상을 부풀리고 있을 것이나, 분명히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유가와보다는 이시가미의 심정으로 읽을 것을 권한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사랑이란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그 사랑의 열쇠를 풀어내는 일은 독자의 몫이다. 가슴 뭉클함과 뒷통수 치는 재미를 원한다면 꼭 읽어보시라. 히가시노 게이고는 전 작품에서도 그렇듯 감성적인 스토리텔링과 기막힌 반전을 구성하는 데에 확실한 일가견이 있으므로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짜임새있는 구성 능력이 부럽기만 할 따름이다. 벌써부터 슬슬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것도 그 이유다.

용의자 X의 헌신. 제목부터 뭔가 심상찮은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가? 올해 나오키상을 수상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수작이다. 히로스에 료코가 나오는 영화 '비밀'을 본 사람이라면 조금 더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수월할 지도 모르겠다. 그는 동명의 원작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았으며 데뷔작인 '방과후'로 에도가와란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변신', '환야'와 같은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가히 미스테리 소설의 대가라 불릴만한 이력의 작가이다. 그렇다면 내용은 어떤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주 만족스럽다. 캐릭터들은 구성을 위해 알맞은 형태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각기 매력적이다. 이야기의 맥은 들쑥날쑥하지 않고 적당한 긴장감이 유지되고 있으며, 조잡하거나 식상한 느낌이 전혀 없다. 시종일관 독자를 책에서 눈을 뗄수 없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도의인 '재미'를 확실히 보장한다. 본래 사람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린 책은 그만큼 신뢰도와 기대감이 높고 그에 따라 실망도 큰 법인데,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다. 굳이 옥의 티를 집어내자면 간간히 보이는 오탈자 정도랄까.

나는 영화를 볼 때도 반전이 있는 스릴러물을 아주 좋아한다. SF나 판타지도 좋다. 상상력을 배가시키는 일이 즐겁기 때문이다. 교묘하게 짜여진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어가는 재미, 생각지도 못했던 트릭들을 마주했을 때의 짜릿함, 다 맞추었을 때의 그 뿌듯함. 그것은 직접 느껴본 사람만이 알 것이리라.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용의자 X의 마지막 반전이 나올 때까지도 그것을 절대 예상하지 못했다. 원체 두뇌회전이 둔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 몰입하여 다른 생각할 틈이 없었던 것인지. 혹자는 예상 가능한 반전이 되려 아쉬웠다 얘기하지만, 글쎄, 아무래도 좋다. 이 작품의 가장 주목해야할 포인트는 '반전' 이 아니라 '헌신'에 있음이라.

사랑 이야기다. 제목을 달리 좀더 덧붙였다면, '용의자 X의 헌신적인 사랑'이라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 처음부터 살인사건은 순식간에 진행되고, 용의자는 아예 대놓고 나오기에 의아했었다. 진짜 용의자는 다른 사람일까. 살인에 뭔가 트릭이 있나. 갖가지 추리를 하려 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의문은 다른 쪽으로 옮아갔다. 이 책을 읽은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품었을 것이다. 주목해야할 것은 '용의자 X'가 아니라 '헌신'에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헌신을 이야기하려 한 것일까. 헌신이란 과연 무엇일까. 말 그대로 온몸을 다 바칠 수 있는 용기? 헌신은 그 이상의 것이 아닐까. 헌신에 대한 재정의가 내려지는 순간이었다. 용의자의 헌신이 단순히 모든것을 바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사랑, 사랑이다. 사랑할 수 있었기에 용의자 X던 Y던 아무래도 좋았지 않았을까. 두근두근거렸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오히려 미궁의 사건으로 끝났으면 하는 안타까움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도시락 가게에서 일하며 모두에게 좋은 사람인 야스코와 딸 미사토, 그녀의 전 남편이자 살인사건의 피해자 도미가시, 그리고 옆집 남자 이시가미. 이 넷을 축으로 이야기는 시작되고 구사나기와 유가와 등의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사건은 복잡하게 얽혀가기 시작한다. (스포일은 죄악이다. 이미 눈치가 빠른 이들은 나름의 상상을 부풀리고 있을 것이나, 분명히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유가와보다는 이시가미의 심정으로 읽을 것을 권한다.)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사랑이란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그 사랑의 열쇠를 풀어내는 일은 독자의 몫이다. 가슴 뭉클함과 뒷통수 치는 재미를 원한다면 꼭 읽어보시라. 히가시노 게이고는 전 작품에서도 그렇듯 감성적인 스토리텔링과 기막힌 반전을 구성하는 데에 확실한 일가견이 있으므로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짜임새있는 구성 능력이 부럽기만 할 따름이다. 벌써부터 슬슬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것도 그 이유다.

<예고된 죽음의 회상, 아디안텀 블루>

간단히 말하자면, '아디안텀 블루'는 조용히 죽음의 수순을 밟는 류지와 요코의 사랑 이야기다. 어쩌면 너무 뻔한 소재이기도 하고, 처음부터 예상되는 결말은 오히려 식상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파일럿 피쉬'의 저자이기도 한 오사키 요시오의 담백하고도 꾸밈없는 문체는 그러한 우려를 단번에 불식시켜 버린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너무도 투명한 것이 된다.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과 구조는 얼마전 읽었던 '바벨의 개'와 매우 흡사하다. 서서히 죽어간 그녀와 그녀를 회상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 첫 장면은 류지가 그녀를 떠올리기 위해 습관적으로 백화점 옥상에 올라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에게 있어서 옥상은 공허한 마음을 비워낼 유일한 안식처다. 그곳에서 히로미라는 낯선 여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플롯의 시점은 과거로 옮아간다.

- 비참할지도 모르지만 백화점이란 건 왠지 안정적이에요. 여기에 있으면 결정적으로 세상과 따로따로 떨어져 살고 있지 않다는 그런 기분이 들죠. 생활에 필요한 여러가지를 팔고 있어서, 생활의 냄새가 난다고나 할까요. 그런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건물의 옥상에 있으면 내 자신이 아직까지는 사회와 연결돼 있는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쓸쓸한 이야기죠.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팔고 있는 건물 안에는 용무가 없고, 그 바깥에만 착 달라붙어 있다는 게 말이에요. -p77

이처럼 류지는 자신이 왜 옥상에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재차 과거 기억의 편린들을 끄집어낼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역시 사람과의 인연, 그리고 대화에 있었다. 류지가 에로잡지 <월간 발기>의 편집자가 되고, 그리고 그 잡지의 카메라맨으로 요코를 만나게 되기까지의 배경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여기에서 '에로잡지'라는 타이틀이 그들 사랑의 순수성에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무척 자조적인 독백처럼 들릴지는 몰라도, 사람의 인연이란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연스레 사랑하고, 자연스레 이별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던 것.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아디안텀같은 존재였으니까... 나는 그 아픈 시간들을 지켜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죽음을 수긍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또한 그것을 극복해야 할 이유는 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죽음은 사랑속에서 비롯된다>

- 라틴어로는 사랑을 아모르(Amor)라고 한다.

그러므로 죽음은(La Mort)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 - 스탕달, '적과 흑' 中

새 집으로 이사오면서 부엌이 허전해 들인 화분이 하나 있다. 마치 붓으로 점을 찍은듯 작은 이파리들이 섬세하게 매달려 은은한 초록을 내뿜는, 작은 관상용 식물이다. 아래로 흐드러진 줄기는 청초한 여인네의 손짓을 닮아 있다. 그 모양새가 너무도 가녀리고 연약해 보여 '키우기 힘들겠다' 싶었는데, 아니나다를까 며칠 지나지 않아 비늘같이 반짝이던 광택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끝부분부터 바싹 마르기 시작하더니 금새 앙상해지고 말았다. 이를 어쩐다? 볼품없는 그녀의 임종을 지켜볼만한 애정이 내겐 없었다. 기어이 그녀을 베란다 구석의 버려진 공간으로 밀어넣고 말았다. 점점 숨이 가빠오는 그녀를, 나는 짐짓 모른체 하고 있었다. 나중에 이 책을 읽고서야 이름을 알았지만 그녀는, 바로 '아디안텀'이었다.

- 왠지 모르겠지만 한번 오그라들기 시작한 아디안텀은 끝내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한다. 결국 폭탄을 지연시킬 뿐 아디안텀의 근본적인 우울을 치료할 순 없는 것이다. [...] 나는 요코의 그 말을 떠올리며,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열심히 분무기로 이파리에 물을 뿜어 주었다. 이것을 말라죽게 해서는 안 된다. 이 화분은 우울한 상태에서 유일하게 요코가 되살리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 p26

문득 슬퍼졌다. 끝이 예비된 시간을 위한 방치는 분명 살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아무런 관심도 애정도 없던 나의 방치가 과연 용납될 수 있는 것일까. 스스로에게 물음표를 던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