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파 드라마로선 그야말로 파격적인 소재인 근친 간의 사랑. 물론 그간 이 설정을 차용한 드라마가 많았기에 파격적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다. 하지만, 개인적 입장에선 의붓남매간의 사랑은 식상할 대로 식상했기에 그간의 드라마들에 대한 '근친상간 논란'은 놀랍지도 않았던 게 사실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는 왜 저걸 두고 근친상간 운운하며 논란을 일으키나 싶었다. 아, 내 도덕관념은 정상범위에 속하니 태클은 사양하는 바이다.

그런 의미에서 '90일 사랑할 시간', 통칭 구사시는 할머니가 같은 사촌 남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의 처절한 사랑을 그리고 있기에 '파격적'임에 틀림이 없다. 그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근친에 관해선 어떤 나라보다 금기시하고 뒤틀린 윤리관이 조성된 우리나라에서, 것도 공중파 드라마가 혈육 간의 사랑을 온 국민이 시청 가능한 시간대에 방영할 줄. 이걸 두고 천지가 개벽할 일이라고 하던가. 언론이 연방 근친상간 논란을 조장하고 그에 편성해 저질드라마라는 오명도 얻은 걸 보면 개벽하려다가 그대로 사장 당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드라마가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시대가 바뀌기는 했나 보다.

구사시는 사촌 간이라는 위험천만한 설정에다 불륜과 시한부 인생이라는 진부한 설정을 더한 멜로드라마다. 소재만 본다면 자극성을 노린데다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지탄받아 마땅한 드라마지만ㅡ그래서 일부에선 저질이라는 말도 나오지만ㅡ보지도 않고 평가절하하기엔 드라마가 정말 아깝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빼어난 영상미에다가 주연배우는 물론 조연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그리고 속도감 있는 진행속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설레게 하여 뒷내용이 궁금할 지경이다. 드라마를 보게 되면 알게 되겠지만, 근친 등의 소재는 두 주인공의 사랑을 극대화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에 불과하다. 나이가 들수록 어째 최루성 멜로와는 거리가 멀어졌던 나였는데 이 겨울의 문턱에서 눈시울을 젖게 만드는 얄미운 드라마가 바로 구사시다. 또한 '그 여자' 이후 나를 몰입하게 한 대단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저조한 시청률은 시청률 조사기관의 음해라는 말까지 나돌고, 낮은 시청률로 말미암아 조기 종영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서고, 여럿이 보는 것보다 외로이 감정에 젖어들고 싶은 드라마 '90일 사랑할 시간'. 윤리와 금기에 전면 승부를 던져 그 논란과 비판은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지속하겠지만,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조차 따뜻하게 느껴질 그들의 눈물겨운 사랑은 현재진행형 마라톤이다. 아직 초반이기에 남은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는 모르지만, 부디 초심을 잃지 않고 논란과 비판 속에서도 살아남는(...) 드라마가 되어줬으면 좋겠다. 그 논란과 비판을 잠재울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ㅡ2006/11/26 작성

내 20대 시절을 빛내주었던 만화, 엔드. 이렇게 말하니 내가 꼭 노인이 된 것 같지만,  적어도 20대 초반을 함께했던 만화임에는 분명하다.

1999년 세기말(...)때, 순정잡지 ’이슈’에 연재를 시작한 서문다미 님의 작품 ’엔드’는 초반의 부진 때문에 진통을 겪기도 했지만 서서히 마니아층ㅡ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다른 분들은 어떨는지 모르겠다ㅡ를 형성하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SF계는 다 죽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참담한 현실에서 유일하게 버텨주고 있던 이 고마운 작품 역시 결국은 편집부와의 의견조정에 실패하여 연재를 내리고야 말았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연재중단에 얼마나 열 받았는지 모른다. 말 그대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 당시 내가 엔드에 쏟고 있던 애정이 얼마나 컸었는지를 말하자면, 팬 사이트를 운영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팬픽을 처음 쓰게 된 것도 이때였다. 나에게 있어서 ’엔드’는 그만큼 의미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많은 시간이 흐른 만큼 다른 작품이 그 열정을 대신하고 있지만, 여전히 완결을 보고픈 작품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인터넷 연재 소식을 들었을 땐 굉장히 좋아했었는데 그것도 무기한으로 연기되어 내 가슴을 무던히 아프게 했다.

’초능력’과 ’엔드’가 만나 갖가지 사건들이 벌어지고, 과거가 얽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서 피어나는 사랑(!).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분명하게 갈리는 문제의 작품이기도 한 ’엔드’. 다미 님의 "엔드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말씀만 믿고 애타게 기다리는 독자가 비단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다미 님이 엔드를 다시 그리는 날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