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햄릿이 나왔다. 그것도 꿈결 클래식에서, 셰익스피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연구자에 의해 쓰인 햄릿이다. 꿈결 클래식은 1번이 헤세의 데미안, 그리고 2번이 햄릿이다. 데미안 번역과 책 구성,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이번 꿈결 클래식 2번도 큰 기대와 함께 볼 수 있었다. 깔끔한 번역과 주요 장면에 대한 일러스트들, 해제에 쓰인 사진 자료들 이 모두에서 꿈결 출판사가 책을 대하는 태도를 잘 알 수 있다. 내용이야 너무나도 유명해서 사족을 다는 것조차 무의미해보일 지경이다. 러시아 철학자 베르쟈예프는 이렇게 말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정성껏 읽는 것은 인생의 큰 사건이다.’ 이 말은 이렇게 변용될 수도 있다. ‘햄릿을 정성껏 읽는 것은 인생의 큰 사건이다.’ 오직 줄거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극작품 햄릿에 대한 상세한 줄거리 요약이 지천에 널렸기 때문이다. 글을 정성껏 읽는다는 것은, 세계 최고 작가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플롯을 따라가기 위함이 아니다. 한 문장 한 문장 그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행간 의미와 세상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을 느끼는 것이 작품을 ‘정성껏’ 읽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좋은 작품을 ‘재차’ 읽어야 하는 이유다. 최고의 예술가는 어찌 보면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마치 잉여나 관조자와 같은 느낌을 주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을 가장 명확히 꿰뚫어보고 있는 자가 바로 예술가이며 보이는 세상을 넘어 ‘보이지 않는 무언가’까지 다루는 게 작가다. 셰익스피어는 바로 그런 작가다. 제대로 읽는 방법은 원어를, 중세영어로 된 햄릿을 읽는 것이지만 백정국 교수의 우리말 번역도 아주 마음에 든다. 햄릿을 읽지 않았던 사람, 햄릿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아래 발췌문들을 읽어보고, 마음에 들면 이 햄릿을 읽어보길 권한다.

99쪽.

로젠크란츠 ‘야망이란 실체 없는 공기처럼 가벼운 그림자의 그림자일 뿐이지요.’

햄릿 ‘그렇다면 거지들이 실체이고, 제왕들과 우쭐대는 영웅들은 거지들의 그림자인 게로군. 궁정으로 갈까? 정밀이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179쪽.

왕비 ‘오, 햄릿, 네가 내 가슴을 둘로 갈라놓는구나.’

햄릿 ‘오, 그럼, 상태가 심한 쪽은 던져 버리고 나머지 절반으로 더 순결하게 사세요.’

259~260쪽.

햄릿 ‘저런 자는-이 찌꺼기 세대가 홀딱 반한 비슷한 떼거리가 내 알기로 수두룩한데, 놈들도-겉멋만 잔뜩 든 말투에 사교를 한답시고 누룩 거품 같은 허장성세를 일삼으며, 키질과 체질로 가르고 고른 뭇 여론 사이로 버젓이 헤집고 다니지. 하지만 시험 삼아 훅 불면 거품은 모조리 날아가 버려.’

노통브의 작품은 항상 충격적이다. 어릴 적 대단히 흥미롭게 봤던 작가들이 나이 먹고 보면 ‘다소’ 아쉽게 느껴질 때가 많은데 노통브의 작품은 아직까지 굉장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리르’지는 이 책을 완벽하게 평가한다. “완벽하게 구성된 걸작. 상뻬의 데생처럼 시작해서 스티븐 킹 소설같이 진행되다 마침내는 베케트 연극처럼 끝을 맺는 소설.” 따라서 이 작품은 회화 같기도, 영화 같기도, 연극 같기도 하다. 마치 칸트처럼 정확하게 네시부터 여섯시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그는 부부의 삶에 반갑게 받아들여지고, 악몽으로 변한다. 사회 속에서 나 자신의 위상과 타인들과의 관계에 대해 깊이 고찰해 볼 수 있는 수작이다. 증오와 애정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서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어떤 사회학자는 ‘정중한 무관심’이라고 칭했던-가 어떤 양상을 띠는지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하는지 깊은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의 심리도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수많은 허례허식과 거대한 감정의 골을 낳는 미세한 감정변화까지 많은 것이 섬세히 쓰였다. 체호프의 ‘상자 속의 사나이’ 같이 보길 추천한다.

기다리던 책이다. 우리나라만 그런 건지는 몰라도 항상 유명 작품들만 이 출판사 저 출판사 재탕되는 현상이 있었다.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 책은 기존에 번역되지 않았던 작품 다수를 담고 있어 그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홀스또메르’가 반가웠다. 몇 달 전 연극이 상연되어 보고 싶었지만 원작을 먼저 보지 못했기에 망설이다 연극을 보지 못했던 일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책 맨 앞에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세심한 배려가 만족스러웠다. 보통 번역을 거치면 작품이 죽게 마련인데 톨스토이는 어떤 번역에서도 살아남는다. 그의 작품은 그 자체로 명품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하면 보통 몇몇 장편과 단편(특히 우화)이 유명한데 이 책은 톨스토이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다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바보 이반’은 너무나도 많이 번역되었던 작품들이다. 굳이 백 페이지와 제목을 할애해 구성할 가치가 있었는지에 대해선 아쉬움이 든다. 이 외에는 대다수가 미번역되었거나 고작 몇 번 번역되었던, 흩어져 있던 작품들이어서, 이렇게 한데 모아 본다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다. 번역도 정갈하게 되어 있어 톨스토이의 (한국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보고 싶은 독자에게 만족스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