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만 선생님의 작품을 오랜만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친필 싸인까지

펴보자마자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익숙하지 않고 전혀 모르던 몽고의 풍경이

마치 동영상을 보는 듯 그려져 있습니다. 1권은 테무진의 탄생부터 혼인, 그리고

부족으로부터 쫓겨나 방황하는 일까지 담겨있습니다. 혼인 장면까지 보며 느낀 것은

제가 알던 상식과는 다른 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칭기즈칸의 명언 중 들쥐를

먹으며 연명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테무진이 유력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약간 혼동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책을 보다보니 테무진의 아버지가 죽고

마을에서 쫓겨난 뒤 생활을 보니까 비로소 이해가 됐습니다. 당시 몽고는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였습니다. 유목민족의 특성과 혹독한 추위, 식량 부족은 그들을

너무도 쉽게 분열시키고 아침의 친구를 저녁에 배신하게끔 만들었습니다.

예수게이가 죽자마자 그의 가족을 버리고 떠난 마을 사람들이 너무하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들로선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좌절과 고통스러운 세월이 없었으면 과연 테무진이 '칭기즈 칸'이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신기했던 것은 그 테무진도 어릴적 열등감에 시달리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배다른 형에게 밀려 대회에서 2등을 하고 마을에서 쫓겨난 뒤에도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하는 테무진이 안타까우면서도 우리와 다를 것 없는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어찌보면 또다른 위대한 정복자 나폴레옹의

삶과도 닮은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도 어릴 적 덩치가 작아 놀림을 많이 받고 식민지에서

태어났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점에서 말입니다. 1권만 읽어

아쉽지만 한권한권의 완성도가 높고, 싸인이 있어 소장가치가 훌륭합니다. 뒷권들도

구입해 어서 읽어보고 싶습니다. 수많은 자료에 입각하면서도 상상력을 발휘해

좋은 작품을 펴낸 허영만 선생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살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었고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자 나는 칭기즈칸이 되었다

몇 시간 안돼 다 읽었습니다. 이 책은 단순한 만화책이라기보다는 어떤 문학 작품을

만화화 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극한의 갈등이나 어떤 큰 힘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지만 서술자가 독자의 손을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어가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이 작품은 저자 크레이그 톰슨의 자전적 그래픽노블이라고 합니다. 사실 톰슨이라는

작가를 담요를 통해 처음 알았기 때문에 읽으면서 작가를 떠올린다기보다 한 '미국인'의

성장기라고 생각하며 봤습니다.

학교나 아이들 많이 있는 곳에서 따돌림이 있고 패거리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미국의 모습이나 한국의 모습이나 별 다를 게 없더군요. 똑같이 사람사는 곳이니까

당연하겠다만 너무 비슷해서 놀랐습니다.

톰슨이 그렇게 놀림받고 게이취급까지 받아가며 쓸쓸한 학창시절을 보냈다는 것과

지금 톰슨의 작가로서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사람 하나 없고

모든 어린이들은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마를 피는 장면이나 성교를 하는 장면, 신앙을 강요하는 사람들의 모습,

종교에 거부감을 느끼는 모습, 성서의 모순을 지적하는 장면 등은 꽤나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끼게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상을 받았고 타임지가 최고의 만화로 꼽은 것을 보면 미국은 역시 표현의 자유가

분명한 나라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무신론자라 미국 교회의 일반적인 모습같이

보이는 장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대마가 심심하면 구할 수 있는

것이라하더라도 책에 싣는 것은 책의 파급력을 생각한다면 삼갔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도 듭니다.

그리고 담요의 알레고리가 내용과 잘 버무려져 있습니다. 담요 갖고 싸우는 형제의

모습으로 시작되는 책, 눈으로 뒤덮인 마을, 레이나의 추억이 담긴 퀼트 담요, 더이상

예전같이 내리지 않는 눈. 촘촘하게 잘 짜여진 책입니다.

내용상으로 아쉬웠던 것은 크레이그가 레이나에게 이별을 고하며 담요를 불태우는 장면인데요.

사람이 만나면 헤어지는게 당연한 일이라지만 꼭 제 얘기 같아서 덤덤히 읽을수만은

없었습니다. 아마 이것이 '소설' 문학이 가진 힘이겠지요. 기존의 것들과의 헤어짐,

그리고 새롭게 시작된 길, 새하얀 눈 위에 찍힌 삶이 담긴 발자국까지 연결이 좋았습니다.

요즘 나오는 웬만한 소설들보다는 훨씬 나은 작품입니다. 앞으로 톰슨 작품 눈여겨

보고 싶습니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나보코프, 체호프, 톨스토이 등 많은 작가들의 문학이론을 읽었다. 파묵의 강연록을 읽고 느낀 것은 대가들은 통한다는 것이다. 파묵처럼 독학을 한 사람이든, 어릴 때부터 고급교육을 받은 사람이든 종국에는 같은 말을 한다. 문학은 삶이고, 소설은 삶을 여과없이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45p. 소설 쓰기는 독자의 기대와 체스를 두는 것입니다. 독자의 기대를 예측하고 앞서 나가는 한편, 경험한 것과 상상한 것을 노련하고 현명하게 섞는 일입니다.

습작 할 때 고민하던 것에 대한 해답이었다. 작가가 어디까지 상상하고 어디까지 예측하고 어디까지 계획하고 써야하는가를 항상 고민해왔는데 성찰적인 그러나 소박하기를 바라는 파묵은 창작을 체스에 비유하며 끝없는 두뇌싸움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그동안 책을 읽었던 자세를 반성하게 된다. 책을 읽을 때 이게 복선이겠구나, 어떤 이미지를 넣으려고 했구나,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줄곧 해왔지만 체스를 둘 때처럼 집중하고 소설 속에 파고들려고 한 적은 없다. 내가 지금까지 놓친 게 얼마나 많은지를, 앞으로 책을 볼 땐 어떻게 봐야 할 지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51-52p. 전혀 경험하지 않았던 것도 실제 경험한 것처럼 우리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도 느낍니다. 이러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작가의 ‘역량’이라고 합시다. 이 역량은 정말로 멋진 것이며, 소설가의 존재를 잠깐이 아니라 전적으로 잊고 소설을 읽는 것은 무척이나 재미없는 일이라는 것을 한 번 더 환기하고자 합니다. … 소설 예술의 강력한 특징은, 우리가 작가를 가장 많이 잊는 순간, 그가 텍스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가를 잊는 순간, 작가의 세계가 자연스럽고 실재라고 느끼며, 작가의 ‘거울’을 완벽하고 자연스러운 거울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