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윤제님의 전작 <말공부>를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주위에서 좋다는 말을 들었기에 읽기 전에 기대가 무척 컸다. 저자는 고전의 해석에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자가 집중하는 것은 고전을 통한 배움이 삶에 어떻게 스며들게 하는지의 문제다.

 

저자는 결코 만만하지 않은 이 문제 차근차근 풀어준다. 인격의 완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어떻게 좋은 습관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저자는 책을 시작한다. 저자의 논의는 결코 세상과 유리된 가르침이 아니다. 저자는 늘 세상을 염두에 둔다. 그렇다고 세속적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골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자연스럽게 조화하는 법을 알려준다.

 

그 과정에서 저자가 펼쳐내는 것이 바로 고전이다. <논어> <맹자> <사기> <춘추> <손자병법> 등 저자가 뽑아드는 고전의 종류는 바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무작정 인용구절을 던져주고,적당한 해설을 버무려서 들려주는 게 아니라, 저자의 삶에서 고전이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들려주는 것이어서 더욱 미덥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이 정도의 책을 만들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내공을 길러야했을까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마냥 고전을 읽는 것도 답이 아니고, 고전에 대한 통찰 없이 세상에 나가는 것도 정도가 아니다. 이 둘이 서로 당기고 끌어주며, 씨실과 날실이 얽히듯 조화될 때 비로소 우리는 고전의 가르침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내가고전을공부하는이유, 조윤제, 흐름출판

작년 12월 남경태 선생의 부고를 접한 뒤 헛헛해지는 마음을 어쩌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남경태 선생의 단정한 한국어 덕분에 어려운 인문번역서를 소화하기도 했고, 팟캐스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과 ‘타박타박 세계사’를 통해 좋은 가르침을 얻었던지라 더 그랬다. 그런 사정 때문에 휴머니스트에서 나온 <종횡무진 한국사 1>이 내게는 무척이나 반가웠다. 사실 이 책에 관한 소문을 한참 늦게야 듣고 나서 구입하려 했지만, 그때는 책이 절판돼 있던 터였다. 그리고 이제야, 그 소문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우선 저자의 글은 다른 한국사 책들과 서술 방식이나 문체가 다르다. 저자는 이를 테면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6세기 중반 한반도에 신문이 있었다면 남부의 톱기사는 단연 나제동맹의 파괴와 백제 성왕의 죽음, 신라의 한강 하류 점령이었겠지만, 북부의 경우는 달랐을 것이다.” 내친 김에 한 대목 더. “호랑이가 떠나면 여우가 위세를 떤다고 했던가? 항복한 부여융에게 더 가혹하게 군 사람은 실제 정복자인 소정방이 아니라 김춘추의 아들 김법민이었다.” 호랑이가 여느 역사서에서 어쩔 수 없이 풍겨지는 번역투의 뻣뻣한 문체와는 뭔가 다르다. 지루함이란 걸 잊고 역사책을 읽어나갈 수 있는 동력은 바로 저자의 문체일 테다.

 

이 책에서 가장 내 마음을 끌었던 것은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한국사를 보려는 저자의 시도다. 저자의 글을 읽고 있으면 우리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서술된 대중 역사서를 읽으며 느꼈던 피로가 해소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를 테면 고구려의 전성기(광개토왕 시기)에 고구려가 삼국 통일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을 두고 “그야말로 ‘오늘의 관점’일 뿐”이라면서 저자는 “광개토왕은 사실 삼국 통일을 이룬 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고구려는 한반도형 왕국이라기보다 중국형 제국에 가깝다는 식으로 정리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 관한 저자의 설명도 생각해봄직 하다. 저자는 신라의 삼국 통일에 관해 평하면서 “통일된 영토가 좁아서 아쉽다.”, “그래도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식으로 일관하지 않는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완전한지 불완전한지를 규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시기를 계기로 한반도와 중국 사이에 정식 사대 관계가 자리 잡게 되었다는 점”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는 고려시대의 역사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관한 저자의 평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내가 기억하기로 교과서는 이 두 사서를 민족의 자주성과 주체성이 드러난 책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저자는 “두 문헌 모두 <삼국사기>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려 한 게 아니라 그 사대주의 정신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삼국유사> 전권에 걸쳐 사용된 중국 황제의 연호라든지 <제왕운기>에 실린 원 황실의 지지를 고려 왕실의 영광이라며 칭송하는 대목이 그 증거다.

 

책을 넘기다 보면 약간 빼곡해 보이는 각주가 있는데, 이것이 내게 상당한 재미를 주었다. 책을 한 번 읽고 나서 이 각주들만 모아서 읽어봐도 좋을 정도다. 동서양사를 아우르면서도 역사의 미세한 결을 헤아려주는 설명이 무척이나 유익하다. 광종이 광덕(光德)이란 연호를 사용한 것에 대해서 “실은 당시 중국이 분열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었던 것 뿐”이라고 지적한다든지, 고려가 몽골에 맞서 30년이나 항전할 수 있는 배경에 관해서 당시 유럽 전선에 화력을 집중했던 몽골의 사정을 설명하는 대목이 그렇다. 여기에 국사 교과서에서 쓰는 “여몽 연합군”이라는 표현이 왜 잘못된 것인지를 설명하는 대목도 덧붙일 수 있겠다.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민족주의에 벗어나려는 저자의 노력이나 역사를 오늘날의 관점만이 아니라 당대의 관점에서 보려는 저자의 시도는 물론 책 전반에 나타난다. 그렇지만 몇몇 대목은 갸우뚱하게도 한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가정이기는 하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으면서도, 구태여 충숙왕이 만주를 관장하는 심양왕이 되었을 때를 만주 병합의 호기(好期)로 가정하는 대목에서는, 저자의 의도를 감안한다고 해도,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팔만대장경에 대해서도 “전란의 와중에 불력으로 외적의 침략을 막겠다는 생각으로 대장경을 주조한 것은 아무리 13세기의 발상이라 해도 지극히 비현실적”이라고 저자는 평하는데, 굳이 ‘지극히’라는 부사를 붙인 데에는 그야말로 오늘의 시각이 깃들어있지 않는지 의문이 솟기도 했다.

 

작은 아쉬움을 지적하긴 했지만, 내가 읽은 대중역사서 가운데 이 책만큼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 책은 여태껏 없었다. 내게 역사책을 읽는 즐거움을 안겨준 남경태 선생이, 이제는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내가 만난 <종횡무진 한국사>는 방대한 한국사를 단순히 두 권으로 압축해 놓은 개설서가 아니었다. 이름난 대가의 책을 그대로 베낀 책이 아니라, 한국사를 세계사적 흐름에 놓는 남경태 선생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잔뜩 충전된 책이다. 몇몇 역사저술가들이 객관성을 담보한다는 핑계로 학자연하며 쓰는 건조한 문체는 정말이지 이 책에서 찾기 어렵다. 자기 나름의 시각으로 역사를 읽는 일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그리고 재기 넘치는 문체가 역사를 얼마나 맛깔나고 생동감 있게 하는지를 남경태 선생은 멋지게 증명해 보였다.

종횡무진한국사1, 단군에서고려까지, 남경태, 휴머니스트

주인공 후유코는 고미네 집안 네 자매 중 막내다. 후유코는 성격이 특히 예민하고, 한동안 울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다. 후유코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약간 창백한 빛을 띤 하얀 피부, 살갗 밑으로 정맥이 파랗게 비칠 정도로 안쓰러운 느낌을 자아낸다고. 또... 뭐랄까. 마야콥스키나 자살한 러시아 시인 예세닌의 시집을 읽고 있기도 하고, 에세닌이 사랑했던 보스호라스 바다를 보는 걸 꿈꾸기도 하는 여성이랄까. 그렇지만 이런 것으로 다 설명되지는 무언가가 후유코에게는 있다.

 

후유코는 나카가키 노보루라는 카메라맨이 진행하는 라디오에 사연을 보낸 게 계기가 되어 도쿄에서 라디오 어시스턴트를 맡게 된다. 후유코는 라디오 방송일을 하면서 도쿄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광고 모델로 발탁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화려하고 번잡한 도쿄의 분위기에 휩쓸리지는 않는다. 후유코에게는 확실히 남들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다음은 후유코의 말이다.

 

“... 모든 사람들에게서 호감을 받고 싶기는 하죠. 그렇지만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 원래 크기의 나를 여러분이 좋아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일부러 나를 크게 보이려고 노력하거나 작위적인 내 모습에 호감을 가져주기를 가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없어요. 그런 건 뭔가 답답하잖아요.”

 

이런 후유코에게 나는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마음을 주게 된다. 이를 테면 후유코의 다음과 같은 생각이 좋다. “사진을 찍어버리면 왠지 방심하게 되거든요. ... 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내 마음속 필름에 평생 단 한 번뿐인 이 거리를 낙인으로 찍어두고 싶어요.” 그런 후유코는 첫 잠자리를 갖은 뒤 남자로서 인생을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가와모토를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간은 모두 스스로 싸우고 스스로 구원을 얻어야 해.”라는 후유코 자신의 말대로, 그녀는 한 인격체로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소설은 내가 온전히 읽어낸 이츠키 히로유키의 첫 소설이다. 도서관에서 <청춘의 문>을 뒤적여본 적은 있지만, 무려 7권에 이르는 그 대작을 다 볼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히로유키 소설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가 쓰는 소설은 특히나 남성적이고 굵직굵직한 서사가 주를 이룰 거라는 선입견을 나는 지니고 있었다. 그런 인상 때문인지 그가 네 자매 각각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썼다는 소식에 갸우뚱했던 것도 사실이다. 남성 작가가 과연 네 자매를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지 좀 의아스러웠다. 그러나 페이지 몇 장을 읽어나가면서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남성 작가와 여성 작가를 벌써부터 구분지어 문체나 캐릭터 묘사를 떠올렸던 내 촌스러운 지레짐작이 겸연쩍어졌다.

 

소설의 말미에 후유코는 셋째 언니 아키코가 하려는 환경운동이 자신이 느껴왔던 문제의식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울증은 어쩌면 그런 지구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면서도 그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 원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제 아픔을 이겨내면서 세상을 향해 내딛는 후유코를 응원하고 싶다. 비록 그 길에서  상처 받고 쓰러지게 될지라도, 계속 전진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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