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시절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진실을 거스르는 것이라면 무엇이 되었든 문제제기를 해야 하고, 꼭 거짓을 진실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러한 생각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전보다 생각이 많아졌음은 고백해야겠다. 거짓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감내해야 할 것들과 피해를 보게 될 사람들과 그것이 끼칠 영향까지를 모두 고려하게 된 것이다. 본질에 대해서는 더 명확히 바라볼 수 있게 되었지만, 몸의 움직임은 점점 더뎌지는 것만 같다.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일까.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창비, 2009년)를 읽으며 불의에 대처하는 나의, 우리의 자세를 더 많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드러내는 이 사회의 불합리함은 더 이상 들추고 싶지도 않다. <도가니>의 무진시는 바로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학연과 지연, 혈연의 유착관계가 만연한, 선한 얼굴을 하고서 온갖 죄악을 일삼는 위선자들로 가득한,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는 이 똥 덩어리 같은 사회는 언제쯤 제 정신을 차릴 것인가. 다수의 노력으로 그나마 깨끗해지고 있던 사회의 건전함도 작당한 몇몇에 의해 금세 흙탕물로 변해버리는 세상이니 더 말해 무엇 하랴. 무진시의 안개가 쉽게 걷히리라 보이지 않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만 이를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다. 소설에서는 다행히 강인호가 진실을 위한 싸움에 발동을 걸었다. 사업의 실패, 기간제 교사라는 신분, 취직에 대한 대가의 지불, 아내와 새미… 많은 것들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애학원의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의 인생을 반성하고 진실을 찾기 위한 도전에 함께 나섰다. 그러나 결국 강인호도 어쩔 수는 없었다. 강인호의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 대다수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이 무언지 알지만, 무언가를 바꾸어야 하지만 그냥 침묵할 수밖에 없는 다수. 강인호가 마지막 결단의 기로에서 서울행을 택한 부분은 정말 아쉬움이 남는다. 끝까지 함께 하길 바랐다. 아마 작가의 바람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 현실 또한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무진의 안개는 쉽사리 걷히지 않을 것이고, 도가니 상태의 이 사회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한다. 진실은 그걸 지키려고 누군가 몸을 던질 때 비로소 일어나 제 힘을 내리라는 것을. 여러 번 꺾일 수밖에 없지만, 진실은 반드시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란 사실을….

"진실은 말이야. 그걸 지키려고 누군가 몸을 던질 때 비로소 일어나 제 힘을 내는 거야. 우리가 그걸 하찮게 여기고 힘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정말 힘을 잃어." (211쪽)

by 꽃다지, 2009년 7월 12일

고종과 커피!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가 만났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얼마 전에는 덕수궁에서 ‘고종, 커피에 반하다’라는 주제로 행사가 열리기도 했단다. 하긴 고종이 재위하고 있던 시절에 다양한 서구의 문물이 들어왔으니 처음 보는 사물들에 얼마나 호기심이 많았을까. 거기에 맛과 향이 일품이었다면 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탁환 작가의 신작 <노서아 가비>는 커피를 즐겨 마신 고종이 커피 때문에 죽을 뻔한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전개된다. 당시 고종은 커피 애호가였다. 그래서 아들 순종과 함께 커피의 맛과 향을 자주 음미했는데, 고종의 아관파천 시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권력을 휘둘렀던 역관 김홍륙이 유배를 가게 되자 앙심을 품고 고종의 커피에 독을 타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소설의 정점 또한 고종의 독살 사건에 가 있다. 조선 최초의 바리스타라 할 만한 따냐는 역사의 현장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인물로 가공되고 그의 남편인 이반은 그녀를 이용해 고종 독살을 모의하는 반역자로 등장한다.

소설은 커피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전반부는 커피와는 무관하게 따냐의 인생역정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역관의 딸로 태어난 따냐는 아버지가 억울하게 비명횡사하면서부터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중국으로 러시아로 흘러들어가 사기행각을 일삼는다. 그녀의 사기행각을 보고 있노라면 100년 전이 아닌 요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 같다. 유창한 러시아어와 미모와 지략을 갖춘 첩보원 스타일이다. 그런 그녀가 러시아에서 이반을 만나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고종의 바리스타가 된다. 고종에게 노서아 가비를 매일 아침 올리는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노서아 가비>는 한번 읽기 시작하면 쉽게 손에서 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앉은 자리에서 책을 다 읽어버렸다. 전작들에 비해서 스토리 구성이 단순하지 않은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간결하고 빠른 전개가 오히려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 같다. 또한 조선 여인이 광활한 러시아에서 펼치는 사기극, 고종의 커피를 아침마다 대령한 바리스타라는 소재의 신선함이 소설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팩션이기에 고종독살 음모사건이 있었다는 데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작가의 가공으로 이를 재미있게 돌아보았다.

by 꽃다지, 2009년 7월 12일

‘집이 뭐죠?’라고 묻는 텔레비전 광고처럼 ‘도서관이 뭐죠?’라고 묻는다면 과연 무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지식의 보물창고? 아님 공부하는 곳? 딱히 맘에 드는 답이 떠오르진 않지만 한 가지만은 이야기할 수 있겠다. 지금의 도서관은 너무 정숙하다는 것, 그리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는 것이다. 도서관은 책을 읽고 감상하고 빌리기엔 너무 딱딱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도서관은 독서실화되어 있다. 숨조차 쉬기 거북하다. 이래서야 어디 맘 편히 책을 볼 수 있을까. 이에 새내기 도서관 사서가 감히 도서관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도서관 사서가 되기까지의 과정, 도서관 사서로 몇 년을 보내면서 느낀 단상들을 글로 옮겼다. 지금의 도서관 분위기를 정확히 꼬집어 제목으로 쓴 <쉿, 조용히!>(2009, 부키)가 바로 그 책이다.

대출사고나 고성방가 정도의 사건사고나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던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정말 기상천외했다. 물론 우리는 이 책의 저자가 미국인이고 우리와는 사고와 생활방식이 다른 미국이라는 나라의 도서관에서 벌어졌던 일임을 감안해야 한다. 컴퓨터로 포르노를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위행위를 서슴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서관이 제집인 듯 냄새를 풍기며 드나드는 노숙자가 있고, 도서관을 CIA가 감시중이라고 믿는 정신분열자,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무료식사로 저녁을 해결하는 가족, 도서관에서 전도를 하는 사람 들이 있다. 게다가 사서는 책을 많이 읽을 거라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책을 거의 안 읽는 사서와 독서운동 실적에만 급급한 도서관장이 있다.

여러 가지 사건사고를 경험하며 새내기 사서인 저자는 도서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나름대로 모색한다. 도서관이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운영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한다. 그러나 도서관은 너무도 보수적이고 쉽게 변하지 않는다. 도서관은 저자의 바람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나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선 저자와 같은 생각을 가지는 사서들이 많아져야 할 것이다. 국내의 현실을 돌이켜보면, 이전과는 달라지고 있는 도서관을 목격할 수 있다. 무엇보다 도서관 수가 많아지고 있어 좋다. 특히 어린이도서관이 많아지고 있다. 일을 하다 보면 다양한 도서관에 가게 되는데, 시설도 많이 좋아졌고 어린이들이 책을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특히 얼마 전 아이와 함께 간 보라매공원 내 작은 도서관은 너무도 좋았다. 작은 규모의 단층 도서관은 책은 많지 않지만, 부모와 아이가 함께 책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어린이책 위주지만 부모들이 볼 만한 신간이 꽤 있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도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새내기 사서의 이야기를 통해 도서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도서관이 조금씩만 변해 간다면, 독서실 내지 정숙한 공간의 이미지를 벗고 지역민이 함께 책을 읽고, 살아가는 공간으로 충분히 변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은 문화를 보호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9·11 이후 변한 유일한 것은, 도서관에서 중요한 건 사서가 아니라 지역사회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사서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지역사회도 사서만큼이나 중요하다. 내가 이 커리어를 계속한다면 나는 정보를 보호하는 일보다는 지역사회를 한데 묶고 도서관이 상징하는 모든 것을 지역사회가 향유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68쪽)

“도서관을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다. 이용자들이 도서관을 도서관답게 만든다. 그들이 없으면 신성함도 사라진다. 그저 책이 있는 건물에 불과하다.” (210쪽)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도서관도 변해야 한다. 도서관은 음료수를 팔아야 하고 그보다 더 변해야 한다. 듀이 십진 분류법은 어떤가? 너무 구식이다! …… 그리고 제발! 제발! 노트북과 아이팟과 USB 드라이브와 휴대 전화를 연결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자! 시대에 발을 맞추자, 제발!” (408쪽)

by 꽃다지, 2009년 7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