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겨울은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춥고 시린 시절이었다. 감기로 몇 달을 고생하시던 어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백혈병 진단을 받으셨고, 야근으로 인해 제대로 된 신혼 생활을 하지 못하고 삐거덕 거리던 나는 끝내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어머니의 병을 간호하며 작은 회사에 다시 취직하였고,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흘러갔다.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어머니를 돌보았지만, 인간의 미약한 힘은 자연의 순리를 극복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마지막까지도 남편 걱정, 자식 걱정이셨다. 평생을 여자로서, 아내로서, 부모로서 대접도 잘 못 받고 살았으면서 왜 자신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는 건지. 당시 나도 부모가 되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반듯하지 않은 인생, 고마워요>(수선재, 2009년)를 읽다보니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들이었지만, 개인에게 있어서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이야기들이었기에 가벼이 들을 수 없었다. 과거에 잘못 생각했던 일을 뉘우치거나 부모의 이혼과 죽음으로 힘들어하고 방황했던 이야기들, 실직·차별·사별·배고픔 등으로 고통받던 시간들, 고마움을 느꼈던 따뜻한 이야기들이 심금을 울렸다. 인간은 누구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간다. 모두의 아픔이 같은 크기로 다가오는 것은 아닐 터이지만, 아픔의 경중만 다를 뿐 누구에게든 간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아픔을 단지 아픔으로만 끝내지 않고, 이를 극복하여 세상을 더 넓고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들은 한결같이 명상의 시간이 그 힘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명상을 통해 지난날을 돌아보고 아픔을 치유하여, 이 세상을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반듯하지 않은 인생, 고마워요>를 읽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세상을 더 넓게 품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혹 아픔과 상처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달래고 세상을 좀더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by 꽃다지, 2009년 8월 24일

 

문득 학교 다닐 때 곧잘 써 내곤 했던 ‘가정환경 설문지’가 생각이 났다. 가족은 몇 명이고 부모님의 직업은 무엇이며, 월 소득이 얼마고 집에 자동차·냉장고·TV 등이 있는지 물었던 설문지는 때론 공개 거수 방식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어려서 풍족하게는 살지 못했던 관계로 손을 들고 싶어도 들 수 없을 때 괜히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어이없는 설문이었다. 도대체 그러한 설문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괴짜사회학>(김영사, 2009년)을 쓴 수디르 벤카케시도 아마 비슷한 심정이었으리라. 연구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설문지를 들고 시카고의 빈민가를 방문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냉소뿐이었다. 이후 갱단 블랙 킹스의 두목인 제이티의 도움으로 빈민가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동안의 사회학 연구방법론이 얼마나 잘못되었고, 그 연구 결과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정책은 현실과 너무 괴리되어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사회학 분야 전반에 걸쳐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는 어느 정도 나 자신에게 화가 나 있음을 의미했다. 정평 난 사회학자들의 다양한 방편들이, 지금 내가 목격하고 있는 고통들을 예방하는 데는 전혀 무력하다는 사실에 점점 화가 치밀었다. 동료 사회학자들이 주택, 교육, 고용을 위해 개발하고 있는 추상적인 사회 정책들은 가난한 사람들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였다. …… 거리에서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데 저임금의 시시한 직업을 젊은이들에게 권유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일까?” (241쪽)

그동안의 빈민 연구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수디르 벤카케시는 먼저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기로 작정한다. 그리하여 통계와 연구실을 버리고 갱단 두목의 친구가 되어 빈민가를 돌아다닌다. 수디르는 마약거래에서부터 불법 거래, 매춘 등 외부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실들을 거리에서 직접 목격하고,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생존방식을 점차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온갖 불법만 자행하는 줄 알았던 갱단은 의외로 빈민가의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평화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다.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정부와 주택공사, 경찰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을 무시하고 탄압하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갱단은 달랐다. 일정한 수수료를 가져갔지만, 그들을 이해하고 보호해주었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빈민가를 방문하면서 그는 그들의 친구가 되었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외부의 시선에서는 그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가 맞닥뜨린 어려움 중의 하나는 바로 “자네 연구에서 백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 있나?”(202쪽)라는 베일리 부인의 질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빈민가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고찰함으로써 빈민 문제의 해결방안을 도출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애초부터 정부나 경찰로부터 버림받은 존재들이었다. 그들에 대한 연구나 통계가 전혀 그들의 삶을 바꾸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오히려 로버트 테일러 홈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연구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차별과 무시를 극복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내가 이 주택단지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온 이유가 실로 양면적이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열심히 하면 가능할 거라고 빌 윌슨 교수가 장담한 것처럼, 정말로 나는 내 연구를 통해 사회를 진보시키려고 했던 걸까? 이 주택단지 내 가정들의 삶을 깊이 이해한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고정 관념을 바꿀 수 있을까? 갑자기 의문들이 쏟아졌다.” (282쪽)

그들을 처음 만났을 때 대학원생이었던 수디르는 10년의 세월이 거치는 동안 여러 편의 논문을 쓰고 학회에 발표를 하며 연구 결과를 세상에 알렸다. 갱단과의 접촉이 위험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주관적으로 흐를 수 있다 하며 여러 교수들이 만류하는 속에서도 그들의 친구가 되어 빈민가를 누볐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도 여러 번 있었다. 아마 대부분의 연구자들이라면 접근조차 거부했을 것이다. 지금은 컬럼비아대학의 교수가 되어 사회학을 가르치는 수디르에게 사회학은 과연 어떠한 의미일까? 적어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탁상공론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그가 실행했던 방식이 ‘괴짜사회학’이 아닌 사회학 연구의 본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by 꽃다지, 2009년 8월 23일

 

오늘은 원래 회사에 나가려 하였다. 월요일 오전까지 급하게 끝내야 하는 일 때문이었다. 후배에게 먼저 하고 있으라고 해놓고선 오후쯤 나갈 계획이었는데, 집에서 다른 일을 하다 보니 나가기가 귀찮아졌다. 오전만 해도 회사 나가서 일하다가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점점 지나자 시간이 점점 꼬여갔다. 결국 회사는 나가질 못했다. 후배에게 미안함을 무릅쓰고 전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를 나가야 한다는 생각과 다른 일을 하는 몸,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 도대체 무엇이 오늘의 계획을 방해한 거지?

회사에 나가지 못한 대신 책을 읽었다. 신경심리학에 관한 폴 브록스의 <사일런트 랜드>(연암서가, 2009년)였다. 오늘의 내 처지를 많이 생각나게 했다. 내 행동을 작동시키고, 나를 규정짓는 의식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려웠다. 단지 의지의 문제로 치부해버리기에는 너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고민은 더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누구일까?’ 내지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를 생각한다고 치자. 평소 나이기를 바라는 생각과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행동은 상반된 모습을 보일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아이한테 좋은 아빠가 되어야지 생각하면서도, 아이가 떼를 쓸 때 흥분하거나 아이를 심하게 나무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모순된 행동인가. 그럴 때 나의 사고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신경심리학자인 폴 브록스는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이러한 물음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뇌를 다쳐 이전과 전혀 다른 행동과 정신 반응을 보이는 환자들을 보면서 그들의 실체에 대해 심도 깊게 고민했다. 3분밖에 기억을 못하는 사람, 사람들의 뇌가 다 보인다고 이야기하는 남자, 남편의 폭력에는 미소 지으면서 드라마의 평범한 행동에 슬픔을 보이는 사람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환자들은 이전까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뇌가 다치거나 손상되어 이전의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상황은 평범한 사람들에게서도 관찰될 수 있는 현상이다. 내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폴 브록스는 이러한 환자들을 되도록 그들의 관점에서 관찰하고자 노력했다. 제3자의 입장이 아닌 그들의 입장이 됨으로써 그들의 행동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를 유추해보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자아에는 특별한 처소가 없다. 그는 뇌가 곧 자아라는 전통적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마음-신체의 오랜 철학적 주제를 다시 들춰내 사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누구나 분할되어 있는 불연속적 존재이다. 우리의 자아의식을 뒷받침하는 심리과정-느낌, 생각, 기억 등-은 두뇌의 여러 영역에 흩어져 분되어 있다. …… 그래서 인간은 스토리를 말하는 기계이?? 스토리를 말하는가? 그건 누가 벼락을 치고 누가 비를 내리느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다.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스스로 스토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스토리가 우리를 말해준다는 거다.” (73~74쪽)

그의 이야기 속에는 나와 마음, 그리고 관계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 나를 나이게 하는 것, 나의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마음, 사회적 관계 속에서 파악해야 하는 자아. 이러한 물음은 마음-신체의 문제를 떠나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한다. 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뇌와 의식을 규명하는 일이 더 수월하게 될지라도 그가 마지막 부분에 언급하고 있는 자기 복제의 문제에서 볼 수 있듯 진정한 실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계속되지 않을까. 신경심리학의 임상실험 관찰 결과와 본인이 생각하는 인간 정신의 문제를 솔직 담백하게 들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by 꽃다지, 2009년 8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