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를 작성하는 일은 꽤나 어렵다. 문장만 좋다고 될 일도 아니고, 컨셉만 좋아서 될 일도 아니다. 광고 카피를 작성하는 것만큼의 노력과 고통은 아니지만, 브로슈어나 카탈로그 등의 카피 작성도 생각보다는 쉽지 않다. 단순한 제목 정도로 생각할 일이 아니다. 우선은 전체 컨셉이 확실해야 하고, 컨셉에 따라 글의 흐름을 이어야 한다. 감성적인 주제라면 시적인 카피가 나와 주어야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런 어려움들이 있다 보니 입사 초기에는 관련 공부를 하고 강의를 듣기도 했다. 이미 수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그때의 강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수강했던 탁정언 선생님의 카피 강의였다.

카피에 관한 책을 내셨다는 반가운 소문을 듣고, 이내 찾아 읽었다. 시장이 거부할 수 없는 컨셉 카피의 8가지 원리를 정리한 <죽이는 한마디>(위즈덤하우스, 2009년)이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수업도 제대로 다 듣지 못하고, 뒤풀이 자리도 많이 참석하지 못했던지라 아쉬움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책을 통해서나마 계속 강의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갔다.

책은 8개의 단락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카피를 작성하는 8가지의 기본원리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8가지의 기본 작성 원리가 아주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다. 실습을 위주로 한 강의 스타일처럼 책도 독자가 직접 연습해가며 원리를 배워나갈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먼저 ‘사례’를 제시해 이해를 돕고, ‘원리’에 대한 설명을 이어간다. 그리고 컨셉 카피의 원리가 효과적인 이유를 ‘근거’와 구체적인 ‘지식’을 통해 알게 해준다. 이러한 일련의 설명이 마무리되면 ‘따라 해보기’로 들어간다. 책을 보며 스스로 카피를 작성해보고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다.

요즘 같은 자기 PR의 시대에는 반드시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글을 쓰는 기본적인 요령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중 한 분야라 할 수 있는 카피 작성은 튀는 제목으로 다른 사람들과 변별력을 갖게 한다. 카피 작성의 기본적인 원리를 이해한다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by 꽃다지, 2009년 9월 13일

 

나이가 들수록 아는 것은 점점 많아지지만, 아이디어는 고갈되어 가는 느낌을 종종 받곤 한다. 경험으로 유사한 아이디어를 재생산하고, 여기저기 경계를 그어대어 새롭게 자라날 아이디어의 줄기를 절단한다. 그러다보니 사고가 안정적이긴 하지만, 참신하지 못하고, 범위가 좁아진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동서고금의 진리는 머릿속에서만 배회하고, 막상 현실 앞에서는 무력해지고 만다.

도야마 시게히코는 <망각의 힘>(북바이북, 2009년)에서 나와 같은 이러한 상태를 경계하고, 망각의 힘을 활용할 것을 주문한다. 지식도 비만처럼 ‘지적 메타볼릭 증후군’이 있음을 지적하고, 지식의 군살을 뺄 것을 요구한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논어』 선진편)라는 가르침은 지식에 적용해도 타당한 이야기다. 비만은 운동으로 해소할 수 있겠지만, 지적 메타볼릭 증후군에서 운동에 해당하는 것은 망각이다. 하지만 잊는다는 것은 산책 등과 비교해볼 때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96쪽)

<망각의 힘>은 일종의 철학 에세이다. 저자는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단상들을 자신의 생각과 교차시켜 차분히 들려준다. 그래서 독자는 한 편의 가벼운 이야기를 읽듯 차분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들은 가볍게 들린다고 해서 바로 잊힐 성질의 것은 아니다. 연속된 단편들은 일관된 메시지를 지니고 있다. 빠르게 변해가는 지식정보의 사회에서 진정으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그 힘의 원천은 ‘망각’에서 흘러나온다. 나날이 업그레이드되어 가는 컴퓨터처럼 치밀해지고 비대해지는 지식이 아니라 배설과 정화를 거친 지식이다.

“망각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배설작용으로 볼 수 있다. 다양한 지식이 머릿속에 쌓이지만 전부 필요한 지식이라고 볼 순 없다. 중요한 것만 취하고 나머지는 쓰레기로 내보내야 한다. 망각은 이를 분별해 정리하는 작업이다. 쓰레기를 내보내는 일을 게을리 하면 머릿속은 쓰레기로 가득 차 혼란에 빠진다.” (177쪽)

‘망각의 힘’이라는 제목에서 엿볼 수 있는 ‘망각하는’ 행위는, 죽은 자가 레테의 강물을 마시고 이승에서의 지난 과거를 깡그리 잊어버리듯, ‘지우기 위한’ 망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망각을 통해 새롭고, 제대로 된 것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사고의 장치이다. ‘살리기 위한’ 망각인 것이다. 새로운 것은 비워 있어야 채워질 수 있다.

이 망각의 힘은 삶을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태도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 이는 일종의 거리두기이며, 새로운 사고를 위한 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저자는 “멀리서 바라보는 산은 흐릿하게 보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푸르다.”(13쪽)고 이야기하며, “거리를 두고 읽는 글일수록 재미있다.”(14쪽)고 말한다. 막상 가까이 가면 별 것 아닌 것일 수도 있기에 멀리서 그리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방관’의 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깝고, 연관이 있다는 것은 순수하고 보편적인 지식을 방해하는 장애가 된다. 주관은 가장 삐뚤어지기 쉬우며 이와 대립하는 객관도 충분히 옳지 못하다. 방관이야말로 보편적이며 타당에 가깝다. 자연과학은 방관주의의 꽃이다.”(99쪽) 또한 감정의 거리두기는 감정을 최고조로 끌어올릴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곧바로 표현하는 감동은 감동적이지 못하다. 가슴 속을 파고든 절절한 감명이 넋을 울린다. 이때 시도 순수한 정서를 만들어낸다.”(69쪽), “마음에 간직해두면 그리움이 커져간다.(86쪽)”

이렇게 ‘비움’과 ‘거리두기’는 새로운 사고를 위해 꼭 필요한 자세다. 일상의 것들에 집착하고, 매사를 채우고 확인하려는 사고의 방식으로는 새로운 것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유연하고 여유로운 관조적 자세가 사물을 날것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고, 삶의 여유를 가져다줄 것이다.

by 꽃다지, 2009년 9월 12일

이성적인 화해의 본 모습은 무엇일까?

 

장 폴 뒤부아의 신간 <이성적인 화해>(현대문학, 2009년)를 읽었다. 장 폴 뒤부아의 소설은 처음인데도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프랑스적인 삶>을 쓴 작가이고, 그 소설을 읽고 싶다는 바람을 간직하고 있어서였을까. 아무튼 그 친근함으로 인해 <이성적인 화해>가 출간되자마자 읽게 되었고, 편한 마음으로 소설의 내용을 음미할 수 있었다.

 

‘이성적인 화해’. 책을 읽기 전부터 나는 그 의미를 좇고 있었다. 책을 읽어보면 자연히 알게 될 테지만, 왜 이성적인 화해라 했는지, ‘이성적인’ 의미를 붙인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했다. 의미를 반대로 생각하면 ‘비이성적인’ 화해일 텐데, 그러한 화해는 감정에 치우친 일시적인 화해일 것이다. 그러한 화해를 화해라 부를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설령 화해라 이름을 붙여도 오래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이성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화해의 의미를 곱씹다보니 대학 선배가 떠올랐다. 1학년 때만 해도 친하게 지냈던 선배. 그러나 그 선배는 지나치게 냉철한 모습으로 많은 후배들의 원성을 샀다. 나 또한 그 중 한 명이었다. 군대를 다녀오고 화해를 시도하기도 했다. 먼저 손을 내민 건 선배였다. 그러나 화해는 형식적이었고, 시간이 또 흘러갔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시 만난 선배는 예전보다 더 밉쌀 맞게 굴었다. 대학 때 보지 못한 모습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대학 때는 그나마 순수했고,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자고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는데, 졸업 후 몇 년 사이 완전히 기성사회에 물들어 있었다. 그 후로는 연락도 잘 안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점점 더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 적절한 변명을 만들어가며 조금씩 사회와 타협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과연 내가 그 선배와의 이성적인 화해를 거부할 자격이 있었을까. 아니면 서로 좋은 방향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이성적인 화해도 가능했을 텐데….

 

소설 속의 화자 폴 스테른 또한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토록 큰아버지를 증오했던 아버지는 큰아버지가 죽자 거액의 유산을 받고 돌변한다. 과거의 일들을 잊은 채 큰아버지의 집에 살며 그의 물건들을 소유하고 그의 여자와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게다가 우울증에 걸린 폴의 아내는 삶의 희망을 잃고 우울증약과 수면제에 의지해 자꾸만 현실을 도피하려 한다. 폴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할리우드 영화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미국으로 건너간다. 가족과의 이별은 곧, 바깥의 시선에서 안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폴에게 미국행은 내면의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 그곳에서 젊은 시절의 아내를 닮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모순된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시나리오 작가들의 파업 시 파업의 정당한 행위를 방해하는 부역자의 역할-권력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는-을 서슴없이 수락하기도 한다.

 

결말은 좋은 방향으로, 이성적으로 제자리에 돌아오는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인간의, 혹은 인생의 이성과 비이성적인 행동, 현실과의 타협, 모순된 행위들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니 이성적인 화해란 정말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다시 한 번 스치고 지나간다.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 우리네 인생인 것일까.

 

“우리는 각자 먼 곳으로 아니면 반대되는 곳으로 떠났으며 공포의 여러 다른 형태로 이성을 잃었다. 마치 강압적인 뭔가가 우리를 우리 삶에서 쫓아내는 것처럼. 이 기이한 전염병의 근원은 우리 몸속 어디에선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우리가 묵시적으로 결론을 내린 이성적인 화해는 잠시나마 우리에게 새로운 지진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악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다.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문 뒤에, 다시 나타날 준비를 하고서 숨어 있었다.” (342쪽)

 

by 꽃다지, 2009년 9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