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운 정 따위는 없다. 밀림무정!

밀림무정(密林無情). 거칠고 단순하고 치열한 본능만이 존재하는 밀림에는 사사로운 정 따위는 없다. 순간의 흐뜨러짐은 곧 죽음을 불러일으킨다. 벼랑 끝에 선 생존의 치열한 게임은 한치 앞도 예상할 수 없다. 산의 아버지는 조선 최고의 포수였지만, 그 또한 한순간에 패배자가 되었다. 산은 그렇기에 사사로운 정을 내보일 수 없었다. 아버지와 수의 원한을 풀기 전에는 그 어떤 것도 그 앞에선 무의미했다.

경인년에 흰머리를 알게된 건 우연이 아닌지도 모른다.  백두산 호랑이는 영물이지만, 흰머리는 영물 중에서도 영물이었다. 지금 그 영물을 쉽게 볼 수 없는 건 뼈아픈 과거의 한자락이다. 그래서 우리는 경인년에 흰머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밀림무정>(다산책방, 2010)을 쓴 김탁환 작가의 의도 또한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밀림무정>은 크게 두 가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는 한 인간의 끈질긴 내면이고, 다른 하나는 아픈 과거사이다. 이 책에서 후자는 비중있게 부각되지는 않으나 이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해수격멸대의 존재와 동물마저 말살해버리는 일본군의 잔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백두산 호랑이는 영물이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온 산에 철심을 박아 정기를 끊은 것처럼 영이 깃든 존재, 상징성을 지닌 호랑이도 그들에게는 박멸해야 할 존재일 뿐이었다. 산을 속여 흰머리를 연구하고 보호한다는 것은 말뿐인 눈속임이었다. 조선의 영물은 황제를 위한 가죽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정해진 현실이었다.

한 인간의 끈질긴 내면은 산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산은 백두산에서 자랐고, 백두산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그에게 흰머리는 무엇이었을까? 단지 복수를 해야만 하는 존재일 뿐이었을까. 백두산 영물인 흰머리를 건들지 말아야 한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왜 그는 그렇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는가! 산은 바로 흰머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산은 흰머니였고, 흰머리는 산이었다. 거울에 투영된 자아처럼 서로를 보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권모술수와 협박, 거짓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그들을 지킬 수 있었던 건 바로 원칙과 정도였다. 그 끈질긴 인내심으로 그들은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김탁환 작가의 그간 스타일로 보았을 때 <밀림무정>의 소재는 약간 의외였다. 그러나 기막힌 고증과 그만의 상상력을 동원해 다시 태어난 이 책은 독자들을 다시 한 번 흐뭇하게 만들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by 꽃다지, 2010.12.13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다. 개인의 권리가 점점 더 중요시되고, 권위적인 행태가 많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많은 의무를 지니고 산다. 국가로부터 부여받는 의무로부터 조직과 집단이 원하는 의무를 불만 속에서도 이행한다. 시대의 변화는 이러한 의무들에 점점 더 많은 물음표를 붙인다. 의무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세대 차이를 느끼고, 의무를 요리조리 피해가기도 한다. 과연 의무는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것일까?

 

<너의 의무를 묻는다>(뜨인돌, 2010년)는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의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의무의 정의를 찾아가며 이에 수반되는 권리 등의 문제를 함께 논한다. 별다른 생각이 없이 산다면 의무는 반드시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강제적이고 비합리적인 의무 또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의무를 일단은 배척하고 봐야 옳은 행동일까?

 

저자인 이한은 우선 “의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절대적 가치를 갖는 선한 의지를 움직이는 준칙을 찾는 것입니다.”(30쪽)라는 전제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풀어간다. “만들어진 원칙을 지키는 일이 바로 의무”(38쪽)라는 것이다. 그러나 원칙에 따른 의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옳은 원칙들이 모순되지 않고 서로 지지해 주어야 한다. 바람직한 태도는 “무조건적으로 의무를 따르기보다는 소신을 놓치지 않은 채 비판적이고 올바르게 상황을 판단하면서 ‘무엇이 권리인가’를 생각하는 능력을 갖춰야 하는 것”(62쪽)이다. 권리의 핵심은, 누구나 자유롭게 가치를 추구하는 이성적 존재로 평등하게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데에 있다. 이익과 가치를 ‘권리를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추구하는 일이 바로 의무의 핵심이 된다.

 

개성이 강해질수록 개인의 의무와 권리, 그리고 이익에 대해 혼동하는 사람들은 더 많아진다. 의무와 권리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적절히 작동하고, 이익과 권리를 구별할 줄 알 때 보다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던지는 의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by 꽃다지, 2010.11.21

 

 

언론 개혁의 문제는 어제오늘 언급된 것이 아니지만, 갈수록 도가 지나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단순히 언론 개혁의 문제를 넘어서서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하여 국민의 알 권리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사회 감시와 비판이라는 순기능을 지닌 언론이 정부와 기업의 편에 서서 진실을 왜곡하고 권력의 입맛에 맞추기를 스스로 자처한다면 국민은 어떻게 사실을 제대로 볼 수 있으며 가치 있는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특히나 공영방송 KBS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는 TV 수신료까지 받아 도대체 무엇을 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9시의 거짓말>(시사IN북, 2010년)은 언론의 잘못된 병태를 드러내는 보고서이다. 저자인 KBS 최경영 기자는 시사 보도 프로그램을 전문적으로 맡아 왔던 기자였다. 탐사보도팀, 미디어포커스, 특별기획 한국사회를 말한다 등에서 좋은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현 정부의 방송 장악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2008년 여름 '공영방송 사수를 위한 KBS 사원행동'에 소속해 언론의 독립을 외쳤다는 이유로 탐사보도팀에서 스포츠 중계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탐사보도 전문기자가 스포츠 중계팀에 가서 무얼 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철저한 보복인사였다. 그는 2009년 여름 회사를 휴직하고, 미국 미주리 대학 저널리즘 대학원에서 언론학을 공부하며 책을 썼다. 도대체 한국사회에서 언론은 무엇이며, 잘못된 관행은 무엇인가? 워렌 버핏이 주식시장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원인들과 한국의 언론을 대비시켜 한국 언론의 몰상식을 지적한다.

 

이미 한국 언론의 수준을 짐작하고 있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책은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를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기자는 언론사가 고용한 월급쟁이나 마찬가지라는 현실, 객관적 사실이 아닌 추정과 편견을 사실로 만드는 놀라운 능력, 진실 보도보다는 당장 돈 되는 보도를 우선시하는 행태, 권력과 기업을 대변하는 언론의 모습 등은 이미 어디서건 여러 번 들어보았음직한 내용들이다. 저자는 이러한 언론의 거짓말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며 언론의 심각성을 환기시킨다. 방식은 독특하게도 워렌 버핏과 비교하는 형식이다. 몰상식한 주식시장과 아웃사이더로 불리는 워렌 버핏의 탁월함 등을 다양하게 이야기하며 한국언론의 상황과 대비시키거나 비교한다.

 

언론에 대한 그의 고발은 꽤나 가치 일이다. 언론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 이들이 많지만, 아직까지도 언론의 몰상식한 속성을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 또한 많기 때문이다. 언론은 정직하고 옳은 이야기만 한다고 믿어왔던 사람들에게는 충격과도 같은 일이 될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쓴 최경영 기자는 특별히 진보적이거나 사회 비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기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고 싶었고, 그 중에서도 자신이 담당하던 보도탐사를 객관적으로 담아 알리기를 원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거부 당했고, 그가 몸담고 있는 회사는 언론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펜을 든 것이다.

 

이 책에서의 아쉬움은 워렌 버핏과 주식시장에 대한 비교가 이 책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의욕적으로 준비를 한 부분이지만, 시선을 분산시킴으로써 언론의 몰상식에 대한 고발을 희석시켰다. 또한 고발이 수박 컽핥기에 그쳤다는 지적도 피할 수 없을 듯하다. 9시의 거짓말이라는 제목에 따라 언론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고발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깊어지지 못했고 또다른 포인트를 정확히 짚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내 욕심일지 모른다. 언론에 대한 이 책의 진실만큼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by 꽃다지, 2010.11.17

 

** 좋은 글귀

"동기가 좋지 않다면 뛰어난 두뇌, 재치, 판단력 등 인간의 모든 재능이 극단적인 해악이 될 수 있다." (임마누엘 칸트, 47쪽)

"사람을 고용하려면 진실함, 총명함, 열정을 고려해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함이다. 진실함이 없다면 나머지 두 재능이 너를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워렌 버핏, 47쪽)

"보통의 합리적인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맞춥니다. 그러나 고집불통인 사람은 세상을 자기에 맞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진보는 이런 고집불통이들이 이루어냅니다." (조지 버나드 쇼, 89쪽)

"값싼 뉴스는 과잉으로 넘쳐나고, 진짜 정보는 없는 상황, 특히 논쟁적인 주제에서 뭔가 뉴스는 많은데 정보는 없는 현대 미디어의 상황-아그노톨로지(Agnotology)" (로버트 프록토, 1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