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은충이란 인간의 영혼에 침투하여 기어다니다가 결국은 무수히 많은 구멍을 뚫어버린다는 벌레를 말한다. 마음이 악의로 가득 찼을 때,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듯한 불쾌한 감각이 엄습한다면 그때가 바로 수은충이 기어가는 순간인 것이다"

 책서두에 소개된 '수은충'이라는 가공의 벌레에 대한 작가의 설명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7편의 단편이 죄다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조명하는 작품들이네요.

 

살인자의 하루를 그린 '고엽의 날'
근친혼으로 인한 비극을 안고 살아가는 남매의 이야기 '겨울비의 날'
친구를 자살로 이끌고도 친구의 부모까지 농락하는 악행을 그린 '잔설의 날'
사랑하는 손자를 잃은 박탈감으로 경악할만한 짓을 벌이는 할머니의 이야기 '대울타리의 날'
학창시절 반친구에게 이지메를 가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던 여자의 악몽의 크리스마스 이브 '박빙의 날'
잔인한 살인을 저지르는 초등학생들의 이야기 '미열의 날'
자살한 옛 애인의 망령으로 울증에 걸린 아내와 살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 '병묘의 날'

 개인적으로는 '박빙의 날'이 제일 좋았습니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깊은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었거든요.각각의 단편이 살인, 근친, 자살, 이지메 등 우울한 주제들로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수은충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면 주인공은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수은충이 등장하는 순간은 섬뜩하면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저도모르게 책손의 인물들처럼 목덜미를 만져보게 되더군요. 이야기도 그렇고 수은충이라는 가공의 벌레를 등장시킨것도 그렇고 작가만의 독특한 질감이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회색빛이 감도는 이야기를 즐기시는 분이라면 꼭 읽어보시길.

일본미스터리 위주의 편향된 독서습관에서 잠시 벗어나 아주 오랜만에 의학스릴러 한편 접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생각보다 꽤나 괜찮았던 작품이어서 현명한 외도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적 사실과 현실감 넘치는 의학적 묘사 그리고 추리적인 요소가 적절히 조합된 매력적인 의학 팩션이었습니다. 

 주인공인 외과의사 에프라임 캐롤은 해부학 실습 도중 젊고 아름다운 시신과 조우하지만 지도교수인 오슬러 교수는 무슨일인지 해부를 거부하며 실습을 끝냅니다. 그날 저녁 동료의사인 터크와 저녁을 함께한 캐롤은 다음날부터 터크가 병원에 나오질않자 수상히 여기고 터크의 집으로 찾아가지만, 터크는 캐롤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둡니다. 터크의 시신을 해부한 결과 독살임을 알게 된 캐롤은 터크의 죽음을 조사하면서 그가 불법의료시술에 관여된것을 알게되는데..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사실을 기반으로 한 팩션이라는데 있습니다.

실존했던 인물들이 실명으로 등장하여 이야기의 현실성을 갖춤으로써 문학적 즐거움은 물론 19세기말 미국의학계의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었습니다.(담배를 잡은채로 수술을 집도하는 당시 외과의사들에 대한 작가의 고발은 충격적이더군요;) 여기에 주인공이 끈질기게 단서를 추적해나가며 진실에 접근해나가는 과정은 팩션의 진지함에 상당한 오락적 재미를 불어넣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다빈치 코드>처럼 영화화되어도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더군요. 다만 마지막 결말로 치닫는 부분이 그간의 과정에 비해 느슨하다는 약점이 있는데 이부분은 각색할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만약 영화로 나온다면 말이죠^^;

 책서두에 "수천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한사람의 목숨은 희생되어야 마땅한가?"라는 물음이 있습니다. 왜 이러한 질문이 나왔는지는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지는데, 개인적으로는 이에 대한 캐롤의 선택이 씁씁한 여운을 남게하더군요. 시종일관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애쓰던 캐롤이 모든것을 알아낸뒤 진실을 묵과하는 장면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던 순간이었습니다.

죽음의해부

본격 미스터리 소설의 거장 시마다 소지.
작가의 명성에 비해 국내 출간 된 작품수가 적어서 늘 아쉬웠었는데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의 출산 소식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무엇보다 이번작이 더더욱 반가운것은 오랜만에 명탐정 미타라이의 활약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국내 출간된 시마다 소지의 작품 중 <점성술 살인사건>을 제외하고는 <마신유희>에서는 미타라이의 활약이 다소 기대에 못미치 쳤고고, <용와정 살인사건>에서는 등장자체를 안한다고 봐도 무방했으니 명탐정의 활약을 기대한 독자들은 얼마나 허탈했겠는가?

책소개를 보자.

광포한 눈보라에 고립된 외딴집
조증에 가까운 천방지축 명탐정의 활약
화려하게 장치한 트릭과 가슴 시린 살인의 역사

클로즈드 써클, 명탐정의 활약, 화려한 트릭..
더이상 무슨말이 필요하겠는가? 
본격미스터리 애독자에게 이이상 구미당기는 요소가 있을까? 
개인적으로 정통 추리소설인 본격미스터리라면 사죽을 못쓰는 성격이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출간과 동시에 읽어보게 되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유빙관'이라는 기울어진 저택에 손님들이 초대되고 그곳에서 기묘한 밀실살인이 연거푸 일어나게 된다. 곧바로 형사들이 투입되어 사건을 수사하지만 사건에 대한 실마리는 전혀 보이질않고 마침내 명탐정 미타라이와 그의 친구 이시오카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 책은 크게 미타라이 등장 전후로 나눌 수 있다.
미타라이가 등장하기전에는 '밀실살인이 일어났고 형사들은 사건의 갈피를 못잡는다..'이게 주된 내용인데 좀 더 간결하게 다뤄줬었으면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비슷한 내용을 질질끄는것 같기도하고. 하지만 미타라이의 등장과 동시에 사건이 일사천리로 해결되며 더불어 이 책의 참맛이 드러나게 된다. 특히 사건해결과정에서 설명된 트릭의 기묘함과 독창성은 단연 발군이다! 소년탐정 김전일에서나 다뤄질법한 만화적인 요소가 가미된 트릭이라고 할까? 역시 저택은 괜히 기울어진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뒤늦게 등장한 괴짜 탐정 미타라이는 시종일관 기묘한 행동으로 주위 사람의 비아냥을 한몸에 받는데 이 부분은 읽으면서 절로 웃음이 날정도로 해학적고 재밌는 부분이었다. 결국은 이 괴짜가 골치아픈 사건을 깔끔하게 해결해내니 그래서 더 극적이고 재미가 돋보이는것 아닐까? 

아무튼 오랜만에 본격물의 참맛을 느낄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던 작품이었다. 
읽으면서 간간이 보이던 평면도가 왜 이리 반가운건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에서 펼쳐지는 지적유희에 흠뻑 빠져보길 권한다.   

기울어진저택의범죄, 시마다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