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 ‘이달의 책’ 인문부문 선정위원들은 책 선정을 두고 고심한 적이 있다. 부산대 강명관교수가 내놓은 4권의 저서 때문이었다. 한 사람이 1년에 한권 쓰기도 힘든데 한꺼번에 4권을 출간하다니. 게다가 이들 책은 기존 한문학계의 연구 패러다임을 바꿔놓을 문제의식을 담고 있어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4권의 책은 ‘안쪽과 바깥쪽’,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 ‘농암잡지평석’,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이상 소명출판)이다.
그럼에도 선정위원들은 이 가운데 한권도 ‘이달의 책’으로 뽑지 않았다. 아니 뽑지 못했다. ‘가급적 대중적인 도서를 이달의 책으로 선정한다’는 선정기준(?)을 의식해서다. 아쉬움이 컸다. 그래서 이번에 다시 강명관 교수의 책을 접하니, 반가움이 앞섰다. 찬찬히 읽어보니 이 역시 역작이었다. 주저없이 ‘이달의 책’으로 뽑았다. 책벌레들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의 책 문화를 밝혀보자는 게 이번 저서의 목표인듯 싶다.
흔히 조선을 일러 ‘문헌의 나라’라고 한다. ‘문헌대국’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조선 후기 수만권대 장서가의 출현은 그 방증이다. 그러나 ‘책들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세력의 어떤 의도로 어떤 과정을 통해 얼마나 인쇄, 보급되었는지’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책의 어떤 경로로 수입, 수출되었는지, 그리고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을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 저자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조선의 서적, 출판문화는 금속활자의 활용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흔히 금속활자의 시작은 고려로 알려져 있지만, 대량 출판이라는 금속활자의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에 들어와서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동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하자’는 정도전의 주장을 높이 평가한다. 비록 정도전 사후인 태종, 세종 때 활자 인쇄가 본격화됐지만, 이것 모두 정도전의 아이디어를 빌린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조선의 대표적 책벌레로 세종, 조광조, 이황, 이이, 유희춘, 이수광, 허균, 이의현, 홍대용, 박지원, 정조, 정약용, 서유구, 홍석주 형제, 유만주 등을 꼽았다. 대부분 문인사대부들이지만, 그들이 책을 통해 꿈꾼 세계는 모두 같지는 않았다.
조광조, 이황, 이이에게 책은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수단이었다. 조광조는 ‘소학’을 통한 도덕정치를 주창했으며, 이황, 이이는 ‘주자서절요’, ‘사서집주’ 등을 통해 성리학의 이념을 구현하려 했다. 조선사회의 개혁을 꿈꾼 허균, 홍대용, 박지원이 읽은 책 가운데 중국서적의 비중은 압도적이었다 저자는 이들의 문학, 정치사상을 책읽기의 안(조선)과 바깥(중국)을 동시에 봐야 할 것이라고 주문한다.
책 읽기와 관련해 세종과 정조에 대한 평가가 흥미롭다. 세종에 대한 평가는 절대적이다. ‘세종은 조선의 법과 제도, 문화를 창조했’으며 ‘(그것들의) 절대다수는 그의 쉼없는 독서에서 나왔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게다가 세종은 수학, 천문학, 중국어 책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균형 잡힌 독서인이었다.
반면 정조는 독서의 편식이 심했다. 성리학서 위주의 독서를 하였으며, 주자의 세계관으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다. 이를 벗어난 독서와 글쓰기는 ‘문제반정’의 이름으로 탄압했다. 저자는 정조를 호학한 군주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사상 탄압’을 통해 독서문화를 후퇴시킨 장본인으로 평가절하하고 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인쇄, 출판은 더욱 활발해져 가지만, 사상은 빈곤해져 간다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성리학이 국가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책읽기의 폭이 좁아졌기 때문이다. 책이 양반과 남성의 지배수단으로 변질한 것이나 조선시대 내내 한글 금속활자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저자가 조선의 책문화를 마냥 찬양만 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