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옆 테이블에 신문이 놓여있길래 가져다 읽어보니 재미있는 칼럼이 눈에 들어온다.
재미 칼럼리스트이며 소설가라는 사람이 묘비명에 관해서 쓴 칼럼이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묘비명은 영국 극작가로서
1925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조오지 버나드 쇼의 것일 게다.
그는 자기 묘비에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이라고 쓰게 했다.
흔히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라고 번역한다.
그런데 ‘우물쭈물하다’는 결단력이 없다는 뜻이므로 잘된 번역이라 할 수 없다.
정확한 번역은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이다...."
기존의 번역을 지적하면서 그가 정확한 번역이라고 내놓은 글을 보니 웃음이 나온다.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
아무런 풍미도 없는 기계적인 해석이다.
이 문장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는가?
늙으면 다 죽는다는 뜻?ㅎㅎ
아마 이 칼럼리스트는 'long enough'에 방점을 찍은 모양인데,
그렇게 하면 이 문장 전체의 의미가 퇴색된다.
이 문장에서 방점을 찍어야 할 부분은 'stay around'이다.
주변만 빙글빙글 돌았다는 얘기다.
핵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만 어슬렁거리다가 끝났다는 얘기다.
주변만 어슬렁거렸으니 결단력이 없는 게 맞다.
이 칼럼리스트가 영어는 잘 할지 모르지만 번역 능력은 없는 것 같다.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면서 내놓는 번역이 오히려 더 잘못됐다.
'우물쭈물'이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든다면 '어영부영'으로 바꾸는 게 나을 것이다.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보다는
"어영부영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가 더 실감나게 와닿는 말이다.
그래, 거의 모든 사람이 어영부영 살아가지.
중요한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는 것 같은 불안감.
아무리 채우려해도 채워지지 않는 상실감.
불안, 초조, 갈등...
항상 "이게 아닌데..."하면서 무력하게 끌려가는 느낌.
하지만 내가 정녕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모호한 느낌.
그런 불안감을 잊기 위해 무엇인가에 몰두하고 내일에 희망을 걸어보지만
그 내일이 오늘로 다가오면 또 내일로 연기하고...
그렇게 덧없이 세월은 가고,
육신의 노화를 느끼면서 불안감은 증폭되고...
나에 대해 생각할수록 커져만 가는 불안감을 잊기 위해
남편, 아내, 자녀 등 타인에 몰두하고 매달려 보지만
아무리 애써도 지워지지 않는 이 불안감.
종교에 의탁해 신의 은총을 구해도 잠시동안의 위안일 뿐.
아무리 찬양하고 경전을 외워도,
남들 앞에서 경건한 신앙을 뽐내거나 진리를 깨달은 척 해도
혼자만의 거울에 나를 비춰보면
언제나 먹구름처럼 스멀스멀 다가와 나를 포위해 버리는 두려움.
유령의 속삭임처럼 저 깊은 지하에서 응얼응얼 들려오는 소리.
이게 아닌데.....이게 아닌데....이게 아닌데...
어떠한 위선과 교만으로도,
어떠한 지식과 행위로도,
어떠한 성취와 몰입으로도 잠재울 수 없는 이 불안감.
고독감, 쓸쓸함, 외로움, 쫓기는 기분,
무엇인가에 옥죄는 느낌.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어디론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무엇인가를 향해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
세상의 어떤 도취와 망각으로도 지울 수 없는 이 열망.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 무엇이
내 안에서 거세게 밀고 올라오는 느낌.
억압의 답답함과 동시에 폭발에 대한 위기감.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느낌.
뭘까?
왜 그럴까?
그건 '나'.
나가 없기 때문이야.
나를 관계 속에 내팽개치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야.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쳐도,
심지어 신의 눈까지 속여가며 도망친다해도
절대 도망칠 수 없는 게 하나 있지.
그건 '나'.
내가 나로부터 도망치는 건 불가능해.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나로 살 수 밖에.
OOO이라고 이름붙여지기 전에,
주변의 모든 것과 관계를 맺기전부터 나와 함께 있었던 나,
오랫동안 버림받은 채 울고 있는 나를 돌보아야 해.
내 안의 불안감은 그의 울음소리.
그를 보듬고 달래줘야 해.
그를 사랑해줘야 해.
그의 눈물을 닦고 안아주어야 해.
그리고 나의 묘비명에 자신있게 새길 한 문장을 남기는거야.
"나는 나였다!"
물론, 묘비명 따위는 남기지 않고 바람 속에 먼지로 흩어지는 것이 가장 '나'다운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