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가볍고 상쾌한 피아노의 선율이 가득한 3개의 시디를 다 듣고 나니
좀 더 따뜻하고 행복한, 다정다감하고 소박한 제목이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엄마와 아이가 함께 듣는 클래식’이라니, 음반 제목이 너무나 거창하다. 
우리가 ’클래식’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갖게 되는 선입견, 
예를 들면 베토벤 바이러스를 떠올리는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연주,
그도 아니면 적어도 현악 4중주 내지는 실내악단의 연주, 
적어도 이 앨범은 이런 ’클래식’이 주는 느낌에서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3개의 시디에는 각각 제목이 있다. 
1번 시디는 ’엄마가 들려주는 클래식 자장가’, 
2번 시디는 ’아이의 좋은 습관을 키워주는 클래식 태교’
3번 시디는 ’엄마와 아이가 함께 듣는 클래식’ 이다. 

3개의 시디 모두 피아노 연주곡이 가득이다.
받고 나서 제목을 훑어보니 다 들어본 제목들이다. 
피아노를 배운 적이 없어도 누구나 멜로디를 알고 있는 ’엘리자를 위하여’ 라던가, 
’솔베이지의 노래’, ’유모레스크’, ’강아지왈츠’ 같은 유명한 곡들이 적절하게 들어 있다.

실은 2번 시디의 제목인 ’클래식 태교’ 가 끌려서 2번 시디부터 들어보려 했지만;
꾸욱 참고 순서대로 들었다. 


워낙 피아노 소곡들이 선곡이 잘 되어 있고
자주 듣던 곡과 그렇지 않은 곡들을 적절히 섞어 배치를 해놓았다.
’자장가’라던가 ’태교’라던가 하는 제목들은 나름으로 붙인 듯 하다. 
다 듣고나니 시디 3장이 그다지 개성있게 구분되진 않는다.
자장가 시디라고 해서 더 조용한 곡들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며, 
태교 시디라고 해서 더 경쾌한 곡들이 들어있지는 않다. 
곡들 자체가 워낙 드라마틱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연주자의 열정과 클라이막스를 느끼며 감상한다면 
자장가 시디를 들으며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

듣는 동안 몇 번을 웃었는지 모른다.
어렸을 때 나름 피아노를 7~8년쯤 치다가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그만두었는데
유치원때 쳤던 ’소곡집’에 들어있던 짧고 귀여운 소품들이 섞여 있는 것이다.
덕분에 슈만의 ’즐거운 농부’ 를 몇 번이나 돌려 들으면서 즐거워 했다.
’터키행진곡’을 들을 때면 동생이랑 연탄곡집을 같이 쳤던 기억이 나서 또 웃음이 났다. 
가끔씩 그렇게 피아노 학원에 가기 싫었는데, 
그 때 이 시디를 들었다면 아마 더 열심히 쳤을 것 같다.
대체 어떻게 피아노를 쳐야 잘치는 걸까, 궁금했었으니까. 

’쇼팽’의 피아노 곡을 처음 배웠을 때 쳤던 왈츠도 섞여 있었다.
친구들과 누가 더 빨리 치나 종종 내기를 하곤 했던 ’강아지 왈츠’ 부터
이젠 제법 쇼팽을 칠 수 있어, 라며 도전했던 ’화려한 왈츠 e플랫 장조’라던가
’즉흥 환상곡’을 들을 때는 눈을 감고 뱃속의 아이와 함께 춤을 추었다.

클래식 방송을 자주 틀어놓고 지내는 편이지만 
다른 악기보다도 유독 피아노 소리를 참 좋아한다. 
현악기가 주는 새침하고 날카롭지만 약간 거친 맛이 나는 소리보다 
관악기가 주는 부드럽지만 슬픔을 자극하는 소리보다 
나는 피아노 소리가 좋다. 
겨우 열 개의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백가지, 천가지의 표정을 만들어 낸다.

솔직히, ’태교음악’이라고만 포장하기엔 아까운 앨범이다. 
나는 듣는 내내, 우리 아이가 자라면서 이런 좋은 곡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 흥분했다.
우리 아이도 음악을 좋아하면 좋겠다, 라는 바람에서 
우리 아이도 피아노를 치고 싶어하면 좋겠다, 라는 소망까지 생겼다. 
그러면 나는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주면서 이 앨범을 들려줘야지, 하고.
갑자기 나는 욕심쟁이 엄마가 되어버렸다.

우리 아이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나의 야심찬 계획이 하나 더 있으니,
아기를 낳으러 갈 때 이 앨범을 챙겨갈 생각이다. ㅋ


그만큼 들을 수록 참 좋은 앨범이다.
클래식이 어렵다거나 클래식은 잘 안듣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기도 쉽고, 
태교한다고 안듣던 클래식을 꼭 들어야 하나, 라고 생각하는 엄마들에게도 강추다. 
왜냐면, 여기에는 늘 주위에서 듣던 클래식들이 들어있으니까. 
그리고 악기를 배우거나 피아노를 치는 사람들은 기본으로 들으면 좋겠다. 
거창한 연주자들의 공연실황이나, 길어서 부담스러운 전곡연주 앨범 같은게 아니라서 
더욱 친근하고 가깝게 들을 수 있다. 

어느 날 밤, 잘 준비를 마친 남편이 침대에 누웠다.
나는 이 시디를 다른 방에서 작게 틀어놓았었는데 틀어놓은 채로 자러 들어갔다.
눈을 감고 있던 남편이 ’옆집인가? 누가 피아노 치나보다. 잘치네....’ 하는 거다.
나도 웃으면서 ’그러게, 되게 잘친다..’라고 대답했다.
쉬운 선곡과 훌륭한 연주가 만난 결과다. 


친구에게 선물받은 태교 음악 시디들, 책을 사면 따라오는 태교 시디들이 많은데 
늘 듣다가 질려서 다시 라디오를 켜곤 했었다. 
이 앨범을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텐데, 아쉽기도 하지만
우리 아이는 앞으로 주욱~ 이 명곡들을 들으며 자라겠구나 싶어 기분이 좋다. 
동생이 아이를 가지면 선물해줘야겠다.
동생도 나와 함께 ’’터키행진곡’을 치던 생각이 나서 행복해지겠지. 





태교음악, 클래식, 피아노

옛 애인의 결혼식 날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제 나는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되었다고 뿌듯해했다. 어처구니 없게도, 왜, 어른은 울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걸까? 어른도 때론 흐느껴 운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아무도 알지 못할 때, 눈물없이도 메마른 가슴으로 통곡한다. 그것이 이 도시의 비밀스런 규칙이다. (중략)

저지르는 일마다 하나하나 의미를 붙이고, 자책감에 부르르 몸을 떨고, 실수였다며 깊이 반성하고, 자기 발전의 주춧돌로 삼고. 그런 것들이 성숙한 인간의 태도라면, 미안하지만, 어른 따위는 영원히 되고 싶지 않다. 성년의 날을 통과한다고 해서 꼭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나는 차라리 미성년으로 남고 싶다. 책임과 의무, 그런 둔중한 무게의 단어들로부터 슬쩍 비껴나 있는 커다란 아이, 자발적 미성년. (p.43)


코웃음을 쳤더랬다. 
뭐, 별거 있겠어, 그래봤자 드라마 소재로나 쓰일 법한 
그저 그렇고 그런 로맨스 소설 아니겠냐고.

좋아하던 권신아의 일러스트도 표지로는 너무 가볍게 느껴졌고 
표지의 서체부터 은색으로 반짝이는 것이 
그저 그런 유행소설이 아니겠는가, 싶어 볼때마다 늘 외면했다. 

음, 근데 출판사가 ’문학과 지성사’다. 
이 출판사가 그저 그런 통속소설을 내던 출판사가 아닌데, 하고 갸웃했다. 
그래, 밑져야 본전이니까, 
씹어주는 건 책 다 읽은 다음에 하자고 마음먹었다.
책읽는 거 외엔 아무것도 하기 싫던 그날 저녁, 
이 책을 집어든 건 그런 불순한 의도 때문이었다.



아, 근데 이 작가 말 그대로 ’쿨’하다. 
주인공 오은수는 내 동생보다도 어린 서른 한 살 이었건만
난 두번째 장을 넘기기도 전에 오은수에게 확~ 공감해버렸다. 
뭔가 선택하고 결정하는데 힘들어 하고, 소심하게 눈치를 보고, 
이 곳 저 곳 부딪쳐서 해결하기 보단 그냥 둥글둥글 살아가는게 속편한
그녀의 성격은 나와는 전혀 달랐지만
어째 그녀가 발딛고 있는 곳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곳과 같은 곳이라는 
동질감, 혹은 동지애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작가는 어찌나 시원시원하게 나와 내 친구들!의 일상을 그려가는지
나는 그들 모두와 연대할 수 있었다. 

은수는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우습지도 않게 청첩장을 받았고,
그가 결혼을 하던 날 점심시간에 그녀는 배가 고팠을 뿐이고, 
자장면 곱배기를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나서도 허기는 가시지 않았고,
하필이면 그날 가장 친한 친구에게서 ’나도 결혼해’라는 소식을 듣게 되고, 
어찌어찌 위로를 얻으러 나간 자리에서 남의 연애질 줄다리기에 피곤하게 낑겨버리고,
그리고 처음 만난 너무도 어린 남자와 자연스럽게 하룻밤을 보낸다. 
살다 보면 있을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일들. 
이 도시에서 지금도 수백수천명이 벌이고 있을 행각들.
이것 참, 남의 일이 아닌 것을.
어리고 매력적이지만 미래가 없는 남자와 
조건적으로는 참 괜찮지만 매력이 없는 남자 사이에서 
고민하고, 고민하는 은수. 

재인은 뭐 별다른가. 
남들 부러워할만한 혼처, 30평짜리 아파트를 가진 의사를 선택하고, 
이게 아니다 싶으면서도 결혼했다가 끝내 아니다 싶어 이혼하게 되는.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었다가 이혼과 동시에 직장을 구한 그녀.
결혼을 말리지도 이혼을 말리지도 못한 친구들을 원망할 순 없지 않은가.
그래도 다시 일어서면 되는 거니까. 

유희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가장 쿨한 여자인 척 매번 대범한 멘트를 날리면서도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객관적이기 쉽지 않은 법. 
예전에 헤어진 애인이 애딸린 이혼남이 되어 돌아왔을 때
받아주고, 연애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이랑 나 둘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모질게도 굴다가 
결국 안되겠다 싶어 헤어져 버리는 그녀. 



재미있는 사실은 이거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난 아직 은수만큼도 철이 덜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서른 하나, 혹은 서른 둘에 나는 
연애와 결혼과 이혼, 친구와 애인, 가족과 독립, 
은수와 재인과 유희가 머리를 맞대고, 혹은 혼자 끙끙거리면서 고민하던 
이 모든  문제들을 이렇게 진지하게, 가슴 시리도록 고민했던가.
아니, 그러지 못했다. 

난 아직 철이 덜들었나보다. 
이 책이 내게 준 깨달음.

나는 책이 끝날때까지 그럴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은수와 태오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 
이 도시에 아직 살아남은 로맨티스트이기 때문이다. 
철들려면 아직 한참이나 먼 영화 감독 지망생!과 살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어찌보면 나는 이미 결혼을 했으니 누구말마따나 속편한 제도권에 진입한 셈이다. 
그러니 지금와서 옛 애인이 결혼한다고 청첩장을 보내와도 그닥 감흥이 깊지는 않을게다. 
하지만 결혼도 안하고, 연애도 안하던 와중에 그런 청첩장을 받는다면
아마도 친구들을 불러 깡소주를 마시면서 한바탕 울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결혼하기 전 나의 연애행각을 되돌아 보았을 때 
눈물을 찔찔짜는게 아니라 엉엉 하고 대성통곡을 했을게 뻔하다.  
한바탕 울고나야 깨끗이 지울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으니까.


난 아마도 
철드는 골목마다 
한바탕 대성통곡으로 나이를 지워간 게 아닐까. 
내가 아직 은수만큼도 철이 안든 이유는 그게 아닐까. 
은수가 되고 싶었던 ’자발적 미성년’은 바로 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철들지 않은 나의 도시는 
은수의 도시와는 다른 의미로 달콤하다. 
언제까지일지는 모르겠지만.

달콤한나의도시, 정이현, 문학과지성사, 연애, 서른

44p. 
엄마에게서 처음 들은 내 모습이 침을 뚝뚝흘리며 쥐포를 먹는 아기였다는게 좀 그렇긴 했지만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엄마라는 사람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먹을 걸 많이 싸와서가 아니라, 고릿한 냄새가 밴 헐렁한 잠옷을 입고 아무렇게나 내 앞에 앉아 있어서가 아니라... 뭐랄까, 격의 없는 것, 자신이 나에 대해 가지는 사랑이 하늘로부터 받은 천부적 권리임을 굳게 믿는 자의 당당함 같은 것, 그러니까 한때 같은 몸이었던 두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끈이 팔년의 세월? 그거 별거 아니야 하는 듯 우리를 뛰어 넘고 있었다. 팔년만에 만난 모녀는 그렇게 모텔에서 쥐포를 구워먹었다. 

51p.
나로 말하자면, 엄마를 만난 후 비로소 그냥 나일 수 있었다. 엄마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불행했지만 스스로는 불행하지 않았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첫 구절처럼 '행복한 집은 고만고만하게 행복하지만 불행한 집은 가지가지로 불행하다.'라는 말은 그러고 보니 틀린 것 같았다. 행복도 불행도 가지가지다, 가 더 맞는 것 같았다. 사람은 모두 다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처럼 그렇게 스스로 행복한 여자가 되고 싶었다. 


56p. 
이상하게도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이 왜 불행한지. 그건 대개 엄마가 불행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부가 불화하는 집 아이들이 왜 불행한지도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그건 엄마가 불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아, 이 세상에서 엄마라는 종족의 힘은 얼마나 센지. 그리고 그렇게 힘이 센 종족이 얼마나 오래도록 제 힘이 얼마나 센지도 모른 채로 슬펐는지. 

너무나 동감가는 글이다. 아마도 그럴것이다. 행복과 불행은 옆에 있으면 전염되는 감정이니까.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면 사랑할 수록 그 사람의 감정에 쉽게 전염된다. 엄마는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니까, 엄마가 슬프면 아이도 슬픈거다. 엄마가 기쁘면 아이도 기쁘다. 엄마가 기쁜데 배아파할 아이도 없고, 엄마가 슬픈데 고소해 할 아이도 없을테니까. 엄마는 그런 존재다. 이런 당연한 명제가 이렇게 새삼스럽게 다가오다니. 작가가 엄마라서 그런걸까, 내가 엄마가 되어가느라 그런걸까. 


63p.
'우리 엄마는 세 번이나 이혼한 사람이에요. 두 동생이 있는데 우리 셋은 모두 성이 달라요.'라는 말에 그는 '엄마가 참 열심히 사시는 분인가 보구나.' 했다. 위녕은 그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읽고 있던 나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위녕도 깔깔 웃었고, 나도 깔깔 웃었다. 그 이유는 위녕이 설명해 주었다.
'사람을 웃게 만드는 건 대개는 그 말이 핵심을 정확히 찌르고 있을 때니까요. 엄마를 설명하는 데 그 말이 참 맞는 말이거든요. 우리 엄마는 너무 뜨거워요.'

그렇다. 핵심을 정확하게 찌르는 말이다. 
나는 세번씩 이혼을 하면서도 성이 다른 세 아이를 사랑하며 키워내는 비혼모가 참 뜨겁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데 동의한다. 뜨겁게 사랑했고, 그 사랑의 결실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지 않은가. 맞고 살면서도 참고, 상대가 바람을 피우는 데도 참고,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러면서도 남들 앞에서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척 하는 사람들이 더 불쌍하고 안타까운 사람들이 아닐까. 결국 선택은 자신이 하는 거다. 그리고 선택의 기준은 자신의 행복이 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어떤 경우에도 행복을 선택해야 한다.


89p.
가족이라는 것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견고한 울타리 같은 거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적으로 사적인 영역이니까. 당연히 보호받아야 하고 침범당해서는 안돼. 그런데 그런 폐쇄적인 영역에서 힘이 센 한 사람이 힘이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쓰자고 들면 힘이 약한 사람은 당하게 마련인거야. 타인들이 볼 수 없는 장막 저쪽의 세계니까. 그게 부인이든 남편이든 혹은 아이든 노인이든...그 사람이 페미니스트든 사회정의의 화신이든 힘이 센 사람이 폭력을 쓰면 약한 사람은 당하는거... 그게 가족의 딜레마일거야. 낯선 사람이 가하는 폭력은 피하면 되지. 친구가 그러면 안 만나면 되지. 그러나 사랑해야만 한다고 믿는 가족이 그런 일을 저지를 때 거기서 모든 비극이 시작되는 거야.

179p.
어떤 작가가 말했어.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는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힘이 있다. 우리의 성장과 행복은 그 반응에 달려있다.'
그래서 영어의 reponsible이라는 것은 response-able이라는 거야. 우리는 반응하기 전에 잠깐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천천히 생각해야 해. 이 일은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지만, 나는 이 일에 내 의지대로 반응할 자유가 있다, 고. 

207p.
참 이상하다. 내가 힘들고 내가 불행하다고 느꼈을 때, 세상에는 그렇게 이상하고 그렇게 나쁜 사람들만 사는 것 같았는데, 내가 행복하고 내가 편안할 때는 세상에 좋은 사람들이 넘친다. 아니, 실은 그게 반대로 되는 것이던가. 

270p.
누가 그러더라구, 집은 산악인으로 말하자면 베이스캠프라고 말이야. 튼튼하게 잘 있어야 하지만, 그게 목적일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그게 흔들거리면 산 정상에 올라갈 수도 없고, 날씨가 나쁘면 도로 내려와서 잠시 피해있다가 다시 떠나는 곳, 그게 집이라고. 하지만 목적 그 자체는 아니라고, 그러나 그 목적을 위해서 결코 튼튼하지 않으면 안되는 곳이라고. 삶은 충분히 비바람 치니까, 그럴 때 돌아와서 쉴만큼은 튼튼해야 한다고....

338p.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밀키와 라테가 좋아하는 닭고기 통조림을 덜어 먹이통에 넣어주었다. 녀석들은 내가 깡통을 따려고 하자 벌써 그르릉거리며 기뻐하고 있었다. 문득 뉴질랜드에 두고 온 고양이 레오가 생각났다. 나는 오래도록 내가 레오를 거기에 혼자 두고 온 사실을 자책했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 또 고양이 두 마리를 두고 떠난다. 마음은 아팠지만 나는 이제 담담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음, 뭐 딱히 맞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그걸 꼭 내 곁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건 아니란 걸 나는 이제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최선을 다해 존재함으로써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엄마 참 대책없이 긍정적이다. 
그래서 너무나 사랑스럽다. 
술 한잔 마시고 들어와 딸 앞에서 신나는 기분대로 춤을 추질 않나, 
가끔씩은 고등학생 딸이랑 생맥주를 마시러 나가질 않나, 
그러다가도 엄마가 아니라 마치 막내 동생처럼 한없이 여린 모습으로 엉엉 울지를 않나. 

'즐거운 나의 집'은 너무나 역설적이게도 
남들 눈에는 전혀 즐겁지 않다.
세 번씩이나 이혼한 여자가, 
성이 다른 세 아이들을 혼자 키우면서,
그렇게 자주 술마시고 집을 비우고 담배까지 피워대니
그야말로 한국사회의 '결손 가정' 대표처럼 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말이다. 
나는 이들이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 개개인의 행복을 최고로 생각해 주는 집. 
다른 것은 그저 다른 것이라고 인정하면 되는 거지 틀린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집. 
공부가 우선이 아니라 행복이 우선이며,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최대한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고 
사랑하고 사랑받는게 당연한 일임을 느끼게 해 주는 집. 
하루에 하나씩 즐거운 일을 떠올리고 
너무나 힘든 일이라도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말해 주는 엄마가 있는 집. 

결국 '즐거운 나의 집'은 
가족들 사이에서도 다름을 인정하는 넓은 마음으로 
애증을 뛰어 넘어 긍정적인 마음으로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베이스 캠프인게다. 

뜨겁고 사랑스러운 엄마 덕분에 읽는 내내 웃음이 터져나왔고
슬픔때문이 아니라 감동때문에 울기도 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들의 집에 같이 살고 있는 가족이 된 기분이었다.
행복하고 따뜻했다. 

서른 셋에 다시 마주한 공지영, 그녀만큼 나도 성숙했을까. 
나의 집도 즐거운 집으로 만들어 가고 싶다.



즐거운나의집, 공지영,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