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명 작가가 쓴 SF라기에 나름 기대하고 봤는데,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유전자조작, 로봇, 전뇌 등등... 생명과학부터 기계공학까지 참 다양한 SF아이템들을 나름 열심히 끌어모았다. 거기다 현대 일본 사회의 각종 부조리와 갈등을 덧붙여 뭔가를 해보려고 애쓴 흔적은 보인다. 문제는 그 결과물이 지루하고 지저분하고 재미 없더라는 거. 단순히 소재를 다루는 차원뿐만 아니라, 장황한 설명이나 한 페이지 안에서 같은 말을 두세번씩 반복하는 등 비효율적인 문장들도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설정이 그렇다지만 엉터리 조사를 남발하는 문장도 읽기 불편할 뿐이었다.

본문에는 봉식이라는 형태의 규격화된 식량이 나온다. 말하자면, 이 책 자체가 봉식 같달까. 정형화된 틀안에 여러 가지 "가짜" 맛들을 여기저기 박아 놨지만 진짜 음식에서만 맛볼 수 있는 먹는 즐거움은 어디서도 느낄 수 없었다.

평소 일본 소설을 별로 안 읽는지라 잘 모르겠는데, 작가 프로필을 보면 수상경력도 많고 나름 유명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SF 전문 작가도 아니면서 SF를 쓰다가는 이렇게 될 수도 있구나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줬을 뿐이다. 이 작가, 알고 보니 이번 것 말고도 SF 흉내내다가 독자를 멘붕에 빠뜨린 전례가 있었던 모양이고. 독자들의 반응을 봐도 취향을 좀 많이 타는 듯 싶다. 원래부터 이 작가 책이라면 무조건 읽는다 정도의 팬이라면 모를까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지만.

〈전투요정 유키카제〉나 〈고양이의 지구의〉같은 걸 보면 일본의 SF소설도 하드SF부터 라이트노벨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재미를 주는 작품들이 많을 것 같은데 그런 걸 제쳐두고 이런 거나 들여오는 게 개인적으로 아쉬울 뿐이다.

 

모처의 이벤트에 당첨되어 받았던 책. 보내준 성의(...)를 봐서 읽기는 읽었는데 솔직히 내 취향은 아니었다.

도입부를 읽으면서 떠오른 소설이 딱 하나 있었다. 블루타워. SF작가가 아닌 작가가 SF설정들을 요래조래 끌어다가 끼워맞춰 쓴 소설이라는 티가 난달까.

천사백 살 고래로부터 추출된 늙지 않는 유전자. 이를 통해 인류는 불로불사를 손에 넣는다. 하지만 아무나 불로불사의 시술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수의 권력자와 지식층은 그 혜택을 누리지만 반대로 범죄자와 하층민들은 처참한 생활을 이어가거나 최악의 경우 노화를 촉진해 죽음을 앞당기는 처벌을 받는다. 감옥과도 같은 섬 신데지마에서 자란 소년 아키라는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섬을 빠져나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모험을 이어간다.

이 이야기속에 그려진 세계와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의 모습은 참 이질적이다 못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단순히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미래이기 때문만은 아닐 거다.

가상의 역사속 가상의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 〈1984〉나 서양인의 눈으로 서양문명을 비판한 〈멋진 신세계〉속 디스토피아는 지금 여기 21세기에 비춰봐도 충분히 흥미진진하고 실감나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작 21세기에 쓰여진 이 소설은 어색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읽는 내내 갑갑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나름 좀더 넓은 세계로, 섬을 나와 바깥세계로, 나아가 우주로 영역을 확장하려고 애쓰는 것 같긴 한데 내가 느끼기에 그들은 여전히 섬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지구는 고사하고 조그만 섬조차 벗어나지 못 한다.

이 책속에 등장하는 SW유전자는 불로, 즉, 늙지 않게 해줄 뿐이지 엄밀히 말해 불사나 영생은 아니다. 어쨌든 늙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인류에게 닥칠 엄청난 변화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모든 인류가 죽지 않게 된 〈토치우드: 기적의 날〉처럼 말이지. 이런 흥미로운 설정을 갖고 저런 이야기밖에 끌어내지 못 했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자연재해부터 외계인의 침략까지. 종말 이야기도 그 종류가 다양하다. 《최후의 날, 그후》에 수록된 단편들은 그중에서도 주로 핵전쟁을 다루고 있다. 이것도 악마의 속삭임이라거나 신의 심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전쟁은 어리석은 인간이 스스로 원인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이 하기에 따라서 앞당겨질 수도 피할 수도 있는 종말이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20세기 중반 이후에 쓰여졌다. 두 번의 지구적 규모 전쟁을 겪고 동서 냉전이 첨예하던 시대, 핵이라는 선악과를 손에 넣은 인류는 멸망을 향해 내달리는 듯 보였다. 〈거대한 섬광〉에서는 요한묵시록의 비유와 록그룹의 공연을 통해 종말을 향해 질주하는 이러한 인간의 광기를 그리고 있다. 〈바퀴〉에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광신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엿볼 수 있다. 원자도 바퀴도 죄가 없다. 문제는 스위치를 누르는 인간이다.
우리는 대규모 핵전쟁이나 3차 세계대전을 겪지 않고 어찌어찌 20세기를 넘겼다. 구소련은 진작 막을 내렸고 동서 냉전의 벽도 무너진지 오래다. 〈누가 상속자인가〉의 자칭 공산주의자 보고마조프와 미국인 스미스가 21세기 러시아와 월가 시위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
하지만, 여전히 핵공포는 계속 되고 있다. 비록 책속에서 예언된 21세기가 다른 평행우주의 일이라고 해도 여기에서 이들 작품의 또 다른 측면에 주목하게 된다. 종말 ‘그후’에 대한 다양한 상상이 그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핵전쟁 혹은 종말 이후의 모습에서 종종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 세계나 신세계의 모습이 비치곤 한다는 것이다.
〈내일의 아이들〉에서는 생물학적 차이를 극복하고 공존하는 사회를 꿈꾸고 있다. 인류는 수 천 년 동안 외모, 성별, 장애 등에 의해 서로 차별하고 심지어 대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핵전쟁이라는 형태의 종말을 그리면서 ‘지구인’의 공존과 평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상속자인가〉에서는 생존을 위해 협력하는 미국인과 (구)소련의 공산주의자를 만날 수 있다. 지금이야 별거 아닐지 모르지만 한창 동서 냉전이 첨예하던 시대에는 그 자체가 파격적인 설정이었을 수 있다. 여전히 좌니 우니 나누며 갈등하는 한국 땅에서는 이념의 극복이 핵폭탄보다도 더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렇듯 몇몇 이야기를 통해 그려진 또 다른 지구에서 핵전쟁 이후 기존의 물질문명은 종말을 맞지만 인류는 다른 방향으로 진보한다. 그것이 굳이 현세 인류와 같은 종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작품은 레이 브래드버리의 〈부드러운 비가 올 거야〉다. 핵전쟁보다는 차라리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떠올리게 했다. 인간이 사라지고 집과 물건과 동물만 남은 모습은 뉴스에서 봤던 화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했다. 주인을 잃고도 계속 움직이는 물건들과 그것들이 서서히 무너져가는 모습은 한 가정 안에서 우주로 한순간 시야를 넓혀준다. 인간이 없어도 지구는 돈다. 태양이 적색거성이 되어 행성을 삼켜버리기 전까지는 계속 돌 것이다.
〈현대판 롯〉을 보면서는 기존의 가족 개념이 깨지고 해체되는 것을 안타까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가족이라는 틀과 그것을 둘러싼 관습 안에 갇혀 있던 개인의 해방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도 핵전쟁이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저 주인공은 마치 그 날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집을 떠나고 가족을 정리한다. 그것은 핵전쟁으로부터의 피난일 수도 있지만 현대인이 사회와 가정에서 마주하는 온갖 굴레로부터의 탈출처럼 보이기도 한다.
종말 이야기의 또 다른 매력은 이런 식으로 마음에 안 드는 것을 지워버리거나 내가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리셋’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번엔 종말의 방식이 핵전쟁이다. 언제 어디에 핵폭탄을 떨어뜨리고 시작하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달라진다.
부정과 부조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그 모든 것들을 한 방에 쓸어버릴 수 있다면? 그리고 내 마음대로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종말의 공포는 전복의 기회이기도 하다. 구인류가 소수로 전락해 가는 〈내일의 아이들〉이나 개가 사람을 길들이고 사람이 개처럼 살아간다는 설정의 〈소년과 개〉는 섬뜩한 내용만큼이나 짜릿한 뒤집기였다.
SF가 미래를 예측하네 어쩌네 하지만 그래서 이 책의 내용들이 실현되었느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핵전쟁의 위기는 조금 미뤄졌을지라도 여전히 종말의 시계는 돌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종말 이야기가 꼭 현실의 위기를 경고하거나 진부한 교훈을 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종말 이야기만이 그려낼 수 있는 세계 전복, 세계를 단번에 리셋해버리는 통쾌함은 앞으로도 다양한 재미를 줄 것이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