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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과거의 어느 시점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야기 할때면

나는 과거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과거 행동하지 못했다면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같은 결과를 낳고 현재를 맞이할 거라는걸

누구보다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삶에는 늘 후회가 없다.

순간은 늘 현재인 동시에 과거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순간이 모여 나의 하루가 나의 일주일이 나의 한달이

나의 일년이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다.

최근 발간된 <하루>라는 제목의 책이 내가 잊고 지낸 책 한권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내가 나의 순간 순간들을 너무 무심하게 흘려보내고 있었던건 아닌지 다시금 돌아보게 만들었다.

지친 어느날, 그림이 내게로 왔다.

지친 어느날, 하루라는 그림 에세이 책 한권이 내게로 왔다.

막연하게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이름 박영택

지은이 소개페이지를 읽어 내려가다보니 낯익은 프로그램과 그의 저서들이 눈에 들어왔다.

KBS1 <명작 스캔들>. <TV미술관>, <예술가로 산다는 것>, <미술전시장 가는 길>. <예술가의 작업실> 등..

여러 매체에 미술과 관련한 이런저런 글을 쓰며 다양한 활동을 하고있는 지은이 박영택 님

활짝 웃고있는 사진 속 모습에서는 연예인 윤종신 씨의 얼굴이 오버랩 된다.

이 책은 내가 잊고 지낸 책 한권을 떠올리게 했는데, 그 책은 바로 내가 중학생 시절 읽었던

한젬마 <그림 읽어주는 여자> 였다. 1999년 당시에 이 책은 상당한 인기 도서였다.

스테디셀러 5년 연속 등 출간된지 10년이라는 세월이 넘었지만 책은 여전히 독자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듯 하다.

학생시절 읽었기에 사실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위태로웠던 중학생 시절의 나에게

책이.. 그리고 그녀가 들려주는 그림 이야기가 공감과 위안이 되었엇다는 기억 정도만이 남아있는 상태다.

책의 겉표지를 제거하니 책의 또다른 진짜 표지가 모습을 들어냈다.

책을 읽다보니 자연스레 이 책의 표지 이미지 출처를 알 수 있었다.

김승연씨의 작품 이미지를 좌우대칭에 배치하고, 하루를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형상화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노란색 원을 이용해 뜨고 지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어둡고 짙은 도시의 야경..

우리네 삶에서 가장 익숙하고 흔한 풍경이 아닐가 싶다.

p310

김승연 <Street Landscape>,

메조틴트 기법,

40x30cm,

1992

책은 박영택 님의 하루를 그리며 시작 된다.

배드민턴을 친다. 운동을 할 때는 오로지 운동만 생각하게 된다. 잡념이 끼어들 틈이 없다.

힘들지만 재미있다. 그렇게 땀을 흘리고 난 후에 샤워를 하고 집으로 걸어간다.

그런데 그 5분도 채 안되는 짧은 시간이 내 하루의 삶에서 가장 상쾌한 순간이다. - p4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만한 대목이다.

나는 탁구를 친다. 탁구를 할 때는 정말이지 운동만 생각하게 된다.

저자의 말 처럼 잡념이 끼어들 틈이 없다. 역시 힘들지만 재미있다.

저자의 이야기 처럼 나 역시 현재의 시간을 살지만 그 시간 위에 들러붙은 것은 이미 지나가버린 회한의 과거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불안한 미래다. 진정한 현재의 순간을 사는 것은 무척 어렵다는 이야기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주어진 하루를 잘 견뎌내고 내 삶과 나를 둘러싼 세계와 현실이 무엇인지를 안타깝게 더듬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나는 잘 모른다. 해서 일상을 다룬 이들의 작품을 찾아본다.

바라본다. 그들이 바라보는 일상을 통해 내 아둔한 하루의 생을 반성한다.

그렇게 '일상'을 다룬 작업들이 내 눈에 띄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글을 쓰고 자료를 찾다가 그것들을 한 자리에

모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일상이란 주제는 너무 광범위하고 그것을 다룬 작업을 명확히 구분하기도 어려워서

하루를 시간대별로 나누어 표현한 작품들을 추려보았다. - p6

책을 집어 들었을때 습관처럼 정독 하기전 책을 휘리릭~ 바람처럼 날리며 전체적으로 훑어 보았는데

책에 실린 그림 이미지들이 하나같이 낯설었다. 왜 그런가하니 보통의 미술 서적들이 명화나 서양 작가들을

분석하고 해석하기 급급한데 비해 이 책에서는 모두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시간대에 발표된 작업들로

모두 저자가 보고 접한 이미지만을 선별했기 때문이였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들의 작업물 만을 선별해 책에 실은 것이다.

저자의 그러한 시도가 아름답게 느껴지는건 아마도 내가 평생을 그리며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가 싶다.

저자는 시간의 추이에 따라 이미지를 배치한 후 그 하나하나의 이미지에 대해 떠오르는 단상을 써내려 갔다.

그 단상은 결국 우리내 일상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하루의 삶에 대한 이야기 이기도 하다.

아울러 미술작품 자체에 대한 내용도 빠지지 않는데, 저자는 하루와 삶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미술 작품 자체에 대한

이야기 간의 균형을 잡으려 했다고 한다.

작가란 존재는 자신의 삶에서 유래한 모든 문제를 시각적으로 해명하는 이들이다. 미술 내적인 문제를 비롯해

여러 주제, 관심들을 다루는 경우도 많지만 특히 자신의 삶, 일상을 주목하고 이를 형상화하는 경우도 무척 많다.

자신의 일상을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자기 자신 그리고 타인들의 삶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몸이 기울어가는 이들이 예민한 예술가들이다. 화가란 존재를 바라보는 자이고, 바라본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그림은 한 작가가 바라본 세계의 단면이고 그를 통해 사유한 결과가 침전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중략/

미술작품은 우리에게 일상의 익숙한 곳을 무척 낯설게 보여준다. 그 낯설음을 통해 우리는 비근하고 익숙한

풍경이 내포하고 있는 모종의 진실을 읽게 된다. 거대하고 제도화된 폭력 앞에 무력하고 일상에 지친 피곤한 눈을 가진

한 개인의 비판적 상상력, 환각으로 인해 그려진 현실의 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을 통해 우리는 저마다 조금씩

자신의 일상, 하루의 삶을 치유하고 보듬는 내성을 쌓아갈 것이다. 그게 힘이 되어 다시 자기 생을 밀고 나갈 것이다.

오늘 하루를 눈물겹게 살아갈 것이다. - p7~8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삶에서 절정의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생애에서 가장 귀중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다가오는 오늘이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하루를 이 삶의 전부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

- 벽암록

저자의 하루를 들여다보니 자연스레 이 책의 탄생 스토리와 과정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저자가 책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1 at dawn 아침은 그렇게 기적처럼 찾아온다

p017

이윤호 <새벽>,

한지에 먹,

108x70cm,

2008

하늘 가득 어두운 습기가 꽉 차 있다. 종이가 먹물을 흠뻑 머금고 있다. 이런 그림을 수묵화라고 한다.

자그마한 시골 동네는 아직 어둠 속에 눌려 있지만 희미한 미명이 교회의 붉은 십자가 뒤에서 후광처럼 빛난다.

그 아래 작은 길이 뱀처럼 납작 엎드려 있다. 야트막한 지붕과 지붕들도 나무들과 함께 바짝 누워 있다. 그렇게

엎어진 풍경이 조금씩 빛에 의해 밝아오기 직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른바 새벽인 것이다. - p18

나는 전시장을 찾을때면 왠만하면 도슨트 시간을 미리 확인하고 도슨트 시간을 맞춰 간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난해한 미술 작품일수록 도슨트 시간은 작품에 생명을

불어 넣어줄 때가 많다. 저자가 과거 금호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뉴욕 퀸스미술관에서 큐레이터 연수를

마치고 제2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큐레이터 활동 등을 해온 전문가 이기 때문일가..

저자가 작가들의 작업물을 대하는 태도는 참으로 섬세하게 보여진다.

박영택에게는 무심코 흘려버렸을 뱀처럼 납작 엎드려 있는 작은 길 하나까지도 한번 더 살펴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눈부신 아침 햇갈의 기적

p27

민경숙 <모닝>,

종이에 파스텔,

36x28cm,

2008

집 안으로 파고든 아침의 한 조각 햇살이다. 단호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한 아침의 태양빛이다.

흰 벽과 마룻바닥을 때리고 있는 작은 빛 조각은 아침이 실내에 들어와 자신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오랜 시간 침묵으로 가라앉았던 실내가 비로소 아침의 햇살로 인해 자신의 얼굴을 되찾고

말간 살갗과 피부를 회복한 것이다. 그러니 아침의 그 따뜻하고 강한 빛이야말로 마냥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것이다.

작가는 아침에 일어나 거실에 파고들어 자기 존재를 생생히 알리고 있는 저 빛의 편린을 조용히 응시하였다.

너무 기적 같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가능한 오랫동안 저 아침빛을 자신의 몸과 실내 공간에 간직하고 싶었을 것이다.

햇살은 사물의 모든 피부를 애무하며 편애한다. 빛들이 모든 사물을, 존재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시간의 추이에 따라 조금씩 편차를 보이는 빛은 소멸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사물의 피부에 가 닿는다.

- p25~26

참으로 공감가는 내용이였다.

늦잠을 빌미로 이불 속에서 꼼지락 거리기 좋은 주말.. 아침을 알리는 태양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태양빛을 가리면서도 입가에는 기분좋은 미소를 띄우게 된다.

빛 없는 어둠 속에서 오랜 시간 침묵으로 가라앉았던 실내가.. 내 시야의 풍경이 아침 햇살로 다시금 자신들의

얼굴을 되찾고 나 역시 내 말간 살갖과 피부를 회복함에 대한 경이로움과 기쁨이 아닐가 싶다.

태양빛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준 민경숙 님의 <모닝>

그리고 그 소중함을 느낄 수 있도록 섬세하게 이끌어 주는 박영택 저자

참으로 담담하게 작가는 종이 위에 부드러운 톤으로 파스텔을 문질러서 사실적이면서도 섬세하고 감성적으로

태양빛을 담아내고 있다. 내가 너무 하루의 일상에 둔감해 졌을뿐 매일 나에게도 찾아왔을 태양빛 이다.

어둠에서만 빛은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어둠은 빛이 있어야 비로소 자신의 캄캄함을 증명해 보인다.

책에는 때때로 작가들의 작가노트 내용들이 더해져 있어

작품의 의도와 저자의 시선을 느낄 수 있게 도와준다.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

p38

유근택 <샤워>,

한지와 먹과 호분, 채색,

130x160cm,

2004

헐벗은 육체가 물에 의해 씻기는 아침의 한순간을 묘사한 대상의 윤곽선은 낙수와 속도, 시간 속에서 소멸하고

형태감은 불분명해지고 그저 아련한 분위기나 걷잡을 수 없는 속도감을 안겨주면서 영원처럼 얼어붙어 있다.

그것은 유한한 인간의 몸이 영원하고 무한한 세계, 시간앞에서 치르는 모종의 의식을 닮았다. - p42~43

홀로 남겨진 옷걸이

p310

김수강 <코트 행거>,

검 바이 크로멧(Gum Bichromate Print),

160x130cm,

1997

침착하게 가라앉은 부드러운 색조를 가득 품고 있는 이 사진은 단조롭고 고독한 사물을 의인화해서 보여준다.

코트 행거가 마치 사람의 어깨처럼 보인다. 신체가 빠져나간 어깻죽지마냥 그렇게 걸쳐 있다. 옷이 망실된 옷걸이를

보는 일은 어떤 상실감을 안긴다. 부재하는 그 옷의 주인을 자꾸 연상시키는 것이다. 어떤 코트를

이 옷걸이는 걸치고 있었을까? /중략/ 작가는 일상의 작은 사물들과 조우한 기억, 그 만남을 사진의 갈피 안에 품는다.

그것은 일회적인 삶의 흐름 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그 모든 것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자의 눈망울 속에 걸린 사물, 풍경이다.

섬세한 관찰과 느릿한 시선들로 이루어진 일상의 산책 속에서 겨우 건져 올려진 것들은 작고 소소한 것들이다. - p45~47

김수강의 사진을 보며 새삼 집안의 사물들을.. 옷방의 옷걸이를 한번 더 보고 느끼게 한다.

옷이 망실된 옷걸이는 마치 인간의 외로움과 닮아 있는듯 보인다.

불길한 싱크대 풍경

p52

김선심 <검은 꽃>,

캔버스에 아크릴, 석고가루,

142x112cm,

1999

주부로서 매일 아침 무슨 의시거럼 치루고 있는 설거지 행위를 무척이나 그로데스크하게 그려내고 있다.

싱크대를 재현한 것이면서 동시에 싱크대 앞에 놓인 여러 기물들과 쓰레기들을 재구성해서 그려낸 그림이기도 하다.

달콤하고 평화로운 아침식사의 이면에는 이처럼 불길하고 공포스러운 장면이 가득 은닉되어 있는 것이다.

/중략/ 이 그림은 여성의 삶의 공간에 자리한, 여성만이 그릴수 있는 치명적인 부엌 풍경이다.

그녀는 이 같은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작가노트 생략/

김선심이 보여주는 이 아침의 부엌 풍경은 더 이상 따뜻하고 안락한 가족구성원의 보금자리, 목숨이 연명되는 행복한 곳

만은 아니다. 과연 부엌은 어떤 곳일까? 어떤 곳이어야 할까? 아침 식사 후 설거지거리로 가득한 싱크대 풍경을 보면서

떠오르는 생각이다. - p54~57

#2 in the morning 마음 한자락을 들여다 본다

아침 8시의 고속도로

p63

권기동 <8AM>,

캔버스에 유채,

162.2x112.2cm,

2006

작가는 이른 아침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행렬을 그린 고속도로 풍경화를 통해 그 안에 숨겨진 자봉주의의

욕망과 폭력에 대해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을 풍경을 이상적으로 재현한 결과가 아니라 특정 풍경을 빌어

당대의 일상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는 우리에게 일상의 익숙한 곳을 보여준다. 그러고는 이를 무척 낯설게 보여준다.

그 낯설음을 통해 우리는 비근하고 익숙한 풍경이 내포하고 있는 진실을 읽게 된다. 거대하고 제도화된 푹력 앞에 무력

하고 일사에 지친 피곤한 눈을 가진 한 개인의 비판적 상상력, 환각으로 인해 그려진 아침의 고속도로 풍경인 것이다.

- p65~66

저자는 말한다.

더 빠른 성취를 위해 목숨을 건 위태로운 질주는 일상적으로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정속도보다 느리게 간다거나 천천히 좌우를 살피면서 운전한다는 것은 고속도로에서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니 고속도로 자체는 그 어떤 방심이나 여유를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비정한 공간이기도 하다. 다들 똑같은 속도에

똑같이 맞춰서 결사적으로 질주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경마장의 말들과도 같다. - p64

참으로 씁쓸한 현대 삶의 과도한 경쟁과 고단함..

뒤쳐짐에 대한 두려움을 담아내고 있는 아침 8시의 고속도로다.

이 책은 그림 에세이다. 위로가 될만한 내용만 닮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때로는 적나라하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오롯이 보여줌으로써 마음 한켠을 착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어떤 아침, 버스 정류장

p74

최성석 <Bus stop>,

종이에 수채화,

91x72.7cm,

2006

도시 공간은 시간대별로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이른 새벽과 러시아워, 한가한 늦은 아침, 북적이는 점심 때와 다시

적막한 오후 2, 3시, 그러고는 다시 번잡한 퇴근길과 저녁 시간, 깊은 한밤중 등으로 여러 얼굴이 교차한다.

그 얼굴마다 특정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마을버스 정류장에 선 아주머니는 출근시간대의 그 번잡함을

피해 길을 나섰고 차분해진 거리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나의 작업은 관람자가 정말 그 상황에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목적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작가가 '어떤 공간에

있었구나'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도록 하려 한다. /중략/ 자각가 있던 장소를 짐작하고 작가의 시점을 알아보았을 때

관람자의 머릿속에 스쳐지나는 자신의 일사을 되새기고 도시 속의 자신은 어떤 존재였는가에 대한 생각을 환기시키려

한다. - 작가 노트]

- p76~77

자동차가 놓인 거리 풍경

p81

이준규 <street 201201>,

동판화 메조틴트 기법,

40x30cm,

2012

오전 11시 41분, 기억의 수집

p93

윤정선 <0704 11:41>,

캔버스에 아크릴,

60.5x72.7cm,

2010

기억이란 완전하지도 않고 충분하지도 않다. 기억은 늘 불안하고 미심쩍고 자의적이다.

명료하게 모든 것을 장악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불확실한, 불안한 기억에 의지해 삶을 산다.

반복되는 일상으로 인해 누적된 삶에서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것이 또한 기억일 것이다.

기억이 없다면 삶은 없다. 내일은 어제와 오늘의 기억에 의지해 있다. 우리는 늘 기억에 기생해 그 기억을 갉아먹으며

앞으로 조금씩 밀고 나가며 산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거나 느끼거나 사유한다는 것은 지금이라는 시간에 내 앞에

자리한 저 세계에 대한 어떤 기억과의 접점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 p95

#3 at midday 낯선 존재가 되는 시간

푸른 풍경, 망각의 도시

p108~109

금혜원 <Blue Sunday>,

digital pigment print,

145x50cm,

2007

작가는 이 일요일 한낮의 장면을 담담하게 사진으로 찍었다. 제목은 <Blue Sunday>다. 청색 비닐천이 산동네 전체를

거대하게 되덮고 있는 장면에서 연유한다. 이 푸른 풍경은 한국 자본주의의 욕망과 결부되어 있다. 좀 더 나은 삶과

경제적인 이윤을 목표로 가차 없이 삶의 자리를 지워버리고, 폐기하고 다른 것으로 바꾸어버리는 욕망은 역사나 문화,

지난 시간대의 소중한 삶의 자리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중략/ 지속적인 파괴와 자본가의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자율성에 의해 생성되는 비이성적이고 파편화된 도시 비전이야말로 서울의 기원이다.

그런가 하면 서울은 기억상실증과 망각의 도시다.

연속성이 사라지고 파편화된 시간들의 잔해들이 뒤엉켜있다. 추억이 없기에 기억도, 역사도 나아가 문화와 삶도 없다.

- p112~113

생각해보면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며,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p114

가장 나른한 시간의 공포

p310

전금자 <오후 2시경>,

캔버스에 혼합 재료,

130x94cm,

1999

오후 3시가 들려주는 지혜

p128

이왈종 <제주생활의 중도>,

장지 위에 혼합 재료,

194x144cm

2008

오후 3시의 더없이 평화로운 일상 풍경 안에 깃든 지혜이자 깨달음이다.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오후 3시의 시간이야말로 더없이 행복하고 평화로운 순간이자, 우주 자연의 뭇생명체들과 연루되어 있음을 깨닫는 때인

것이다. - p132

권태에 관한 몇 가지 충고

p134

이영춘 <3시 반>,

캔버스에 유채,

91x116.7cm,

1993

현재가 무의미하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은 스스로를 죽은사람 혹은 죄수로 느낀다. 그래서 삶은 '권태'롭고 이 일상에서

그는 '부유'한다.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물음과 삶의 제반 현상을 그만의 독특한 화면 공정과 함축적인 형상의 흔적을

통해 가시화하고 있는 작가의 작업은 이 부유하는 삶 속의 부유하는 영혼에 대한 짙은 애증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이러한 애증이 우리에게 은밀하게 말을 걸어온다. 오후 3시 반에 말이다. - p137

아이스크림 먹는 시간

p159

고위 <행복한 시간>,

캔버스에 유채,

162.2x131.2cm

2011

사랑에 빠지는 시간

p164

노석미 <나는 사랑에 너무 쉽게 빠져>,

종이 위에 잉크,

21x29cm,

2000

남자와 여자가 만나 이루는 그 시간은 이 둘 인생에서 거의 전부다.

자신의 이상적인 이성, 배우자를 찾고 만나고 탐색하고 저울질하는 무수한 시간을 보내면서 늙어갈 것이다.

아니 젊은 날의 대부분을 소모할 것이다. 그 평화롭고, 낙담이 뒤섞인 종착점을 갈망하면서 애태우고 소진한다.

자신의 나머지 생을 거는 도박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이야말로 얼마나 복잡하고 까다로우며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할까? - p168

바다에는 '사이렌'이 산다

p176

김지원 <낭만 풍경>,

천에 유채,

228x118cm

2008

이 그림 속 인물도 역시 등을 보인 채 저 앞의 바다만을 응시한다. 그로 인해 우리 역시 이 거대한 바위 위에 위태롭게

앉아 망망대해를 바라보는 경험을 슬쩍 공유하게 된다. 이른바 감정이입이 잘 들락거리는 그림이 되었다.

회화의 감각이 충실하게 기술된 이 그림은 감정을 실어 나르는 붓질과 경쾌한 선들, 물감의 질료들이 혼재된 상황에서

어떤 한순간을 예리하게 보여준다. /중략/

이 바다 풍경은 누구나 비루하고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저 자리에 앉고 싶다는 충동을 근원적으로 건드려 준다.

- p177~178

#4 late in the afternoon 때론, 은밀한 일탈이 낭만적인 이유

오이 마사지 하는 여자

p203

김호석 <하늘에 눕다>,

한지에 수묵담채,

111x126cm,

2007

대한민국 주부들 상당수가 매일 저녁 무슨 의식을 치루듯이 행하고 있는 이 오이마사지 장며은 단지 피부 관리뿐만

아니라 시간과 노화와 추함을 두려워하는 자본주의 문화를 반영하는가하면 늘 젊음을 유지하도록 부추기는 소비자본

주의가 요구하는 삶의 욕망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본주의라는 욕망 기계에 자발적으로 종속되어 살아가는 이들의 얼굴

이기도 하다. - p202

강제된 휴식

p212

민성식 <당신은 큰 TV를 갖고 있군요!>,

캔버스에 유채,

175x122cm,

2006

비교적 풍족해 보이는 실내 풍경이다. 깨끗한 흰 바닥과 녹색 벽면, 붉은색 칸막이가 기하학적으로 분할되어 있다.

/중략/ 여유롭고 풍족한, 그리고 무척 한가하고 심심해 보이지만 더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몸을 소파에 눕힌 채

벽면에 걸린 벽걸이 텔레비전만을 응시하고 있다. - p213~214

지친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이렇게 쾌적하고 넓은 공간에서 텔레비전과 독대하는 저녁 시간이야말로

오늘날 현대인들의 유일한 휴식일 것이다. 그러나 이 텔레비전과의 대면은 세상과 차단된 채 여전히 너무 많은 볼거리와

과잉된 정보와 시시콜콜한 이야기 속에 욕망이 과부하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휴식이지만 진정한 휴식과는 거리가 멀다.

여전히 피곤한 시간이다. 그 시간 속에서도 끓임없이 욕망하고 소비하는 것이다.

반성과 성찰, 고요하고 느린 사유는 이곳에 자리할 수 없다. 참된 휴식은 저 멀리 벽에 걸린 그림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그것은 어디론가의 도피나 유랑 혹은 자유로움을 상징한다. - p 215

일요일을 보내는 방식

p218

최석운 <김씨의 일요일>,

캔버스에 유채,

117x91cm,

2012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일요일이란 시간은 일주일 동안의 고된 일과와 노동, 약속과 만남으로 인해 지친 몸을

비로소 놓아두고 하루 종일 방바닥에서 뒹굴거나 온종일 텔레비전을 시청하거나 혹은 온종일 먹어대는 자유와 게으름을

안겨준다. /중략/ 애완동물은 현대인의 고독한 삶에서 파생된 존재다. - p218

일요일 오후 김씨는 나른한 상념과 몽상 속에 자신의 육체를 가능한 한 이완시킬 때까지 이완시킨 표정으로 세상을

관조한다. 하루 종일 먹어댄 배는 터지기 직전이고 숨조차 쉬지 못하고 힘겨워한다.

본능에 충실하고 솔직한 이 노골적인 포즈가 동시대 보편적인 한국 남자들의 일요일날에 보여주는 몸이다. - p221

#5 in the evening 하루가 지워지는 일몰의 그 순간

'저녁'은 없다

p232

강경구 <퇴근길>(부분),

한지에 먹과 채색,

90x119cm,

1993

하루를 보낸 얼굴

p239

고찬규 <하루>,

한지에 과슈,

27x35cm,

2012

하루를 보낸 얼굴이라는 제목 만으로도 구구절절 긴 장문의 설명없이도 마음에 와닿는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의 하루를 보낸 얼굴이 이렇지 않을가 싶다.

한켠으로는 아~ 나만 그러한 것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고, 한켠으로는 말할것 없이 씁쓸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나치게 치열하고 지나치게 빠르다.

한 잔이 필요한 날

p251

변윤희 <도저히 이 기분으로 그냥 집에 갈 수 없어 들렀던 그곳>,

장지에 혼합 재료,

162x97cm,

2010

그날 밤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오던, 양복 입은 중년 사내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던 작가는 그 상처와도 같은 장면을

그렸다. 그 남자의 어두운 얼굴에서 보고야 만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저런 얼굴이 낯설지 않다. 그것은 작가의, 나의

얼굴이기도 하다. - p253

#6 a late night 고독한 낙원에서 살아남기

매일매일을 살아낸다는 것

p273

허보리 <완전 피곤 오징어 바디>,

캔버스에 유채,

116.8x91cm,

2012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빵~ 터졌다.

그래서 언니 얼굴에 책의 그림을 들이밀었다.

'이게 뭐야?' 제목이 완전 피곤 오징어 바디야~

'아아~~' 더이상의 설명을 필요치 않았다.

저자가 그러했듯 나 역시 광고카피가 떠올랐다.

떡은 사람이 될 수 없어도 사람은 떡이 돼버릴 수 있다.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p276

신하순 <오늘 하루>,

장지에 수묵 담채,

132x172cm

2002

장지에 수묵담채로 단출하게 그려나간 그림

어눌해 보이지만 대단히 감각적이고 핵심적인 선들로 이루어진 그림이다.

몇 가닥 선만으로도 충분히 침실이 있는 실내 풍경을 효과적으로 전달해 준다. 흠뻑 적셔진 물기와 엷은 황토색을

머금은 장지의 표면이 채 마르기 전에 얇은 선을 그어 이미지를 남겼는데, 그것이 동반하는 농담의 변화 차이가 재미있다.

- p277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잠시 헤어졌던 부부가 다시 만나 이불 속에서 그들이 보낸 하루에 대해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는

이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고 행복한 순간임을 형상화하고 있다. - p280

보는것 만으로도 따듯하고 이야기가 흐르는게 느껴지는듯 했다.

여자를 향한 남자의 표정은 무심하나 시선은 따듯하다.

즐거운 일기

p283

오순환 <단 꿈>,

캔버스에 아크릴,

91x72cm,

2007

생의 증거를 품은 밤

p288

이일호 <한밤중>,

브론즈,

30x37x54cm

2010

불면의 장면

p297

이동환 <문득 깨어 있는 밤>,

장지에 수간채색과 먹,

200x176cm

2003

작가는 깊은 밤에 문득 깨어서 온갖 상념에 시달리는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온갖 상념이 눈앞에서 어지럽게 춤을 춘다. 아직 아침이 오려면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한다. 그 시간까지 나는 견딜 수

없을 것도 같다. 이렇게 살아오면서 저질렀던 모든 일들과 치욕과 슬픔, 회한들이 하나둘씩 그림을 지어 떠돈다.

내 몸속에 들어와 있던 또 다른 나들이 저렇게 내 몸 밖으로 떠나고 있는 것이다. 한밤중이다. - p299

#7 learly 삶의 흔적을 기억한다는 것

거기 위안처럼 달이 떠 있다

p305

김성용 <위로하는 빛>,

디지털 프린트,

42x42cm

2006

다소 눈물겨운 일상

p319

김현정 <끈적한 밤, 목소리>,

캔버스에 유채,

116.3x90.5cm

2010

한갓 비근한 일상의 풍경이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늘 보던 대상이자 수시로 접하던 사물임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이유를 알 수 없이 다가와 감정의 파문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른바 '섬뜩한(uncanny)'감정이 생겨난다. - p316

밤의 상형문자

p322

정동석 <밤의 꿈>,

디지털 프린트,

120x120cm

2004

밤은 빛이 지워지고 사라진 상태다. 그래서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어있다. 검정은 단순한 색 혹은 무색이다.

그러니까 검정이란 밝고 어두운 구별을 결정하는 우리 눈의 망막 간상체가 사물에 대한 인지과정에서 나타나는 색상일

뿐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색이며 우주의 섭리인 빛과 어두움의 이치는 드러내는 색이기도 하다.

인간은 가장 단순하고 익숙한 섭리, 즉 낮과 밤, 빛과 그림자를 당연하게 여긴다. 따라서 흰색, 검은색은 색이기 이전에

우선적으로 받아들이는 세계의 얼굴, 낯빛이다. 그런가 하면 검은색은 삶을 기피하는 것, 즉 모든 긍정적인 발전을

모저건 부정하는 것을 암시하는 색이기도 하다. - p323

24시간, 잠들지 못하는 이유

p334

이승민 <새벽 4시 30분>,

디지털 프린트,

49.8x39.6cm

2006

이승민은 24시간 운영하는 홈플러스의 야간매장을 촬영했다. 그곳은 낮의 매장과는 무척 색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중략/ 물건이 없는 매장을 본다는 것은 갑자기 우리 삶이 빈곤으로 추락할 것 같은 공포심 같은 것을 안긴다.

그래서 매장에는 물건들이 범람해야 제격이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물건으로 가득 찬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간혹 아찔한

공포 같은 것이 밀려들 때가 있다. 그 많은 물건들을 소모하면서 사는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당혹스러울 때가 있는 것

이다. /중략/ 우리가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고 이를 사고 소비하는 행위는 일종의 심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무언가 충족되지 못할 때, 불안할 때 사람들은 쇼핑을 한다. - p335

작가가 보여주는, 다소 스산함을 안기는 새벽 할인매장의 풍경이란 과연 무엇일까? - p339

책은 물음표를 던지며 그렇게 끝을 맺는다.

저자는 자신이 명확히 단정지어 말할 수 없는것에 대해서는 자신조차 물음표를 던지며 생각하고 생각한다.

<하루>를 읽어 내려가며 때로는 제목과 작품이 너무나 절묘하게 매치되어 감탄을 하였고,

때로는 삶의 무거움을 구구절절 나열하며 인생의 고단함을.. 하루의 무거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켠으로는 누구나 인생이 결국 외롭고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현실이고 사실이니

책에서 만큼은 위안만을.. 따듯함 만을.. 안겨줄 수는 없는 거였을가..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평소 보기 어려운 동시대의 작품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지만 아쉬운건 어둡고 칙칙한 순간을 포착한 작품 보다는

밝고 반짝이는 태양빛 같은 작품들이 개인적으로는 더 보고 싶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단순히 그림 에세이 라는 사실을 넘어

그림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 전반에 걸친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다.

그래서 가볍게 한없이 가볍게 읽을 수만 있는 책은 아니였다.

하지만 지치고 지루하게 반복된다고 생각되었던 내 하루 하루의 순간들을 재조명 하고, 새롭게 바라 볼 수 있게

힘을 실어주는 책 인것 만은 분명해 보인다. 내 유일한 '씬'을 위하여..

지친 어느날, 그림이 내게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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