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오만한 현대 문명을 자체 정화하기 위해서 용트림한다. 인류가 지금껏 이룩한 문명이 순식간에 몰락하고, 전멸의 위기에서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이 황폐한 폐허에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때 인류는 어떤 모습으로 문명의 초석을 다시 놓을 것인가? 무한히 반복되는 역사의 수레바퀴처럼 원시시대, 고대, 중세, 근대, 현대의 과정을 당연한 수순처럼 되밟을까? 기존 문명의 흔적을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텐데도?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일본 만화가 유미 타무라의 《바사라》는 이 지점에서 일본을 무대로 중세의 붕괴되어 가는 왕정 체제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 대통령제가 신선하게 받아들여지고, 중국 황실이 고스란히 복구됐으며, 개화기 일본 주위의 바다에 떠 있던 유럽 상선과 군선도 되살아났다. (게다가 동해를 감히 일본해라고 표기하다니, 일본인의 입장에서 일본인 독자를 염두에 둘 때는 그다지 거리낄 것이 없었겠지만, 새로운 인류의 시작을 그리고 싶었다면 새 세계를 창조했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이런 설정은 인류의 재난이나 파멸을 다루고 있는 미국의 할리우드 영화보다도 설득력이 훨씬 떨어진다. 하지만 유미 타무라가 《바사라》에서 형상화한 인물들의 매력과 호소력은 그런 눈엣가시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바사라》의 세 축을 이루는 인물은 ‘시대를 바꿀 운명의 아이’라는 예언을 들은 사라사, 슈리, 아게하이다. 유미 타무라는 ‘시대는 누가 바꾸는가?’라는 거창한 화두에 다소 낭만적인 방식으로 다이아몬드 같은 ‘사랑’을 슬쩍 들이민다. 그 사랑에는 유미 타무라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서두에 인용해 놓은 것처럼 “낡은 권위를 부정하고 인습과 구속을 배제하고 자신의 생각과 의지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정신”과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키는 정의가 내재해 있다. 왕족으로 대변되는 적왕의 무자비한 칼날 아래 오빠를 잃고 친구를 잃고 마을을 순식간에 도륙당한 사라사의 복수심 어린 정의, 무능한 부왕을 대신해 강건하고 부유하며 초록빛으로 가득한 왕국을 가꾸고 싶었던 슈리의 냉혹한 정의, 왕족의 노예로 치욕적인 어린 시절을 보내고도 바람처럼 자유로운 ‘사막의 푸른 귀족’의 당당한 긍지를 잃지 않고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온몸으로 맞았던 아게하의 정의…….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이 이유 있는 정의들이 때론 살벌하게 맞부딪치고 달콤하게 녹아들면서, 모든 것을 화해시키고 용서하는 사랑 안에서 핏방울 뚝뚝 흘리는 서슬 시퍼런 마음을 내려놓고 새로운 시대를 함께 열었다.

물론 시대를 바꾼 정의들은 ‘운명의 아이’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미 타무라가 ‘바사라’의 세계 안에서 싱싱한 생명력을 불어넣어준 수많은 인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이유 있는 정의를 가지고 펄펄 생동한다. 그 ‘이유’는 적도, 동지도, 주인공도, 엑스트라도 구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유미 타무라는 《바사라》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이유’를 만들어주면서 그 이유 있는 정의 안에서만큼은 모두가 주인공으로 빛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것은 그가 아끼지 않은 인물이 없었다는 얘기도 되겠다.

유미 타무라가 구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새 시대를 열기 위해 마지막까지 비장의 무기처럼 꺼내든 것은 ‘사랑’이었다. 그것이 자못 구태의연해 보이고 이상적이고 순정만화 특유의 비약과 한계라고 할지라도 ‘사랑’의 숭고하고 강력한 힘을 부인하고 나설 사람이 있겠는가. 그 힘에 의심 없이 완전한 신뢰를 보내는 유미 타무라의 희망적 메시지가 나를 감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