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한 귀퉁이에 오래도록 먼지 묻은 채로 잠자고 있던 위대한 시인 랜돌프 헨리 애쉬의 소장서, 그 오래된 책갈피에 연서(書)가 툭 떨어진다. 수잔 바이어트의 《소유》는 오랜 세월 누구의 눈길도, 손때도 타지 않은 채 은밀하게 잠들어 있던 애쉬의 로망스를 끈질지게 추적한다.

그렇다면 랜돌프 헨리 애쉬는 누구인가? 그는 작중 가상의 인물로 빅토리아 시대를 풍미했던 대시인이다. 평생의 사랑인 부인 헬렌 애쉬만을 바라보며 누구에게도 곁눈 주지 않고 가정에 충실했으며, 신화의 소재를 차용하여 지적인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찬, 탁월한 상상력의 세계를 구현한 시인. ‘이지적이며 다정다감하고 성실한 가장’의 전형으로 의심할 바 없었던 시인. 그런데 그가 아내 아닌 다른 여인에게 열정적인 연서를 썼다. 누구에게?

그 여인은 누구인가? 그녀는 랜돌프와 동시대를 살았던 여류 시인 크리스타벨 라모트였다. 크리스타벨 라모트는 랜돌프만큼 대중적인 명성을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페미니즘 성향이 짙은 시 세계를 구축한 시인이었다. 평생 결혼하지 않았던 그녀에게는 동성애자라는 딱지도 붙어 있다.

누구도 연관 짓지 못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랜돌프와 크리스타벨의 사랑은 현대의 ‘랜돌프 헨리 애쉬 연구자’ 롤랜드 미첼과 ‘크리스타벨 라모트 연구자’ 모드 베일리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크리스타벨에게 보내는 랜돌프의 비밀스러운 연서를 처음 발견한 롤랜드가 모드를 찾아가면서 빅토리아 시대와 현대에 사랑의 이중주가 울리기 시작한다.

‘A Romance’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만큼 《소유》는 로망스의 감미로운 플롯을 따른다. 현대의 사랑보다 빅토리아 시대의 사랑에 무게중심을 둔 만큼 랜돌프와 크리스타벨의 이야기가 소설의 로망스를 대부분 차지한다. 그들의 시, 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 뭉치, 크리스타벨과 동거했던 블랑슈 클로버의 일기, 랜돌프의 부인 헬렌 애쉬의 일기, 크리스타벨의 사촌인 사빈느의 일기 들의 행간에 교묘히 숨어 있는 사랑의 행적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대범하고,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격렬하고, 이지적이면서도 열정적이다. 그들의 궤적을 쫓는 롤랜드와 모드에 의해 별세계에 살았던 사람처럼 양 극점에 서 있던 랜돌프와 크리스타벨 사이의 간격이 점차 좁아진다.

《소유》의 가치는 로망스의 흐름보다 랜돌프와 크리스타벨의 사랑을 읽을 수 있는 행간들을 더듬어가는 과정에 있다. 각 장마다 실려 있는 랜돌프와 크리스타벨의 작품들이 서로 조응하는 과정은 놀랍고 신비로우며 아름답고 섬세하다. (너무나 미흡한 번역이 원어의 글맛을 전혀 살리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기 그지없다. 하지만 외국어에도 능통하지 못하니 《소유》가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해야 할까.) 생의 공간이 완전히 달랐던 그들이 운명적으로 교차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시(詩)였다. 그들은 서로의 독자적이고도 창조적인 시 세계를 지켜주는 방법으로 애정 깊은 존중을 선택했다. 자신의 의견이 고유한 시적 세계를 깨뜨리고 유리알 같은 시심을 흩뜨릴까 봐 극도로 조심하는 한편 세심하고도 예리한 비평을 성심을 다해 가차 없이 가했다. 그들은 끝내 세속적인 사랑을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시는 서로에게 녹아 들어가서 ‘완벽한 소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물론 빅토리아 시대를 살았던 그들의 반쪽 소유가 현대를 살아가는 롤랜드와 모드에 이르는 과정도 더없이 감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