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도란은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의 꼭대기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시나리오 작가이다. 그는 젊은 시절 할리우드의 화려한 정상에서 최고의 명성과 몸값을 누렸지만(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외화 ‘케빈은 열두 살’을 쓰기도 했다), 이제 퇴물로 뒷방에 나앉게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는 중년 남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나 다행히도 소위 잘나가는 시나리오 작가의 화려한 자의식에 갇힌 채 허우적거리는 필 도란을 지중해의 맑은 햇살 아래로 끌어내 준 현명한 부인, 낸시가 있었다. 필 도란이 《토스카나, 달콤한 내 인생》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내가 필 도란의 책을 읽고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매력에 흠뻑 빠져 즐거운 한때를 간접적이지만 실감 나게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낸시의 엉뚱하고도 깜찍한 사고(?) 덕분이다. 낸시가 다짜고짜 토스카나 언덕 중턱에 있는 조그마한 돌집을 사버린 것이다. 그것도 길도 나 있지 않은.

필 도란의 토스카나 좌충우돌, 우여곡절 정착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길을 새로 내고 돌집을 확장하는 건축 허가를 받기 위한 해프닝과 느려터진 이탈리아식 복잡한 절차들, 그리고 그 집을 판 핑가토레 집안과의 마찰이 커다란 이야기를 이루는데, 필 도란은 그렇게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사이사이 너무나 매력적인 토스카나를 툭툭 내 앞에 던져놓았다. 에피타이저부터 메인 요리까지 제대로 즐기고 섹스는 디저트로 챙길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점심 시간, 엄마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귀여운 이탈리아 남자, 싼값으로도 최상 품질의 진수성찬을 맛볼 수 있는 이탈리아 요리, 시골구석에서도 맛있는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평화로운 휴식을 주는 카페, 집집마다 포도주 저장고에 가득한 키안티 와인, 사내 에스프레소가 묽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당당하게 파업하는 이탈리아 노동자들, 정(情)이 뚝뚝 흐르는 이탈리아인들의 다혈질 수다, 그리고 그들의 구구절절 능청스러운 변명…….

필 도란은 《토스카나, 달콤한 내 인생》에서 끊임없이 투덜투덜한다. 그러나 그 끝도 없는 투덜거림들이 모두 역설적으로 이탈리아 토스카나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미 지중해의 태양 아래 반짝반짝 빛나는 토스카나의 마법에 걸려버린 필 도란은 그가 줄줄이 늘어놓은 단점들도 모두 장점이었다고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당신도 토스카나로 빨리 오라고, 이렇게까지 얘기하는데 당신이 토스카나에 오지 않을 수 있겠냐고, 투명한 햇살 아래 감미로운 와인을 곁들여 맛있는 파스타를 배불리 먹고 진심은 따뜻하기 그지없는 사람들과 목청 높여 수다를 떨자고…….

어쩌면 그들만 억수로 운이 좋아 그토록 매혹적인 토스카나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 도란의 달콤한 유혹에 잠시 행복했다. 그리고 끝내 살벌하고, 각박하고, 가식적인 할리우드에 살짝 담근 한쪽 발을 완전히 빼내지 못한 필 도란처럼, 나도 정신 없이 굴러가는 잿빛 일상에서 완전히 놓여날 수는 없겠지만, 자주 토스카나의 ‘간교한 매력’에 취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토스카나, 달콤한 내 인생》이 내 책장에 꽂혀 있으니까. 입심 좋은 필 도란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라도 언제든 토스카나로 텔레포트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