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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퀴처럼 독서해야 한다

누군가 불쑥 “당신은 책을 읽고 난 후 피로한가?”라고 당혹스러운 질문을 할 때 당신이 어떻게 대답할 지 궁금하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 다시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조금은 이해한다는 듯 피곤(?)하다고 요령 있게 말끝을 흐리게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 소중한 것을 얻고 싶다면 A. 베네트의『나를 즐겁게 하는 것들』중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따라갈 필요가 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진리가 아로새겨져 있다. 즉 자기의 전력을 다 사용하지 않으면 훌륭한 독서 행위를 할 수 없다. 만일 독서 후에 피로하지 않으면 그 독자는 상식(常識)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주희(朱熹)의 유명한『주자어류(朱子語類)』「독서법상(讀書法上」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즉 글을 읽을 때는 반드시 정신을 집중해서 살펴야 한다. 마치 등 뒤에 칼이 있는 것처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온 몸을 곤두세우면서도 피곤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의 단락에 나아가 투철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 머리를 공략하면 꼬리가 다가오고 그 꼬리를 공략하면 머리가 다가와야.” 비로소 옳다, 는 것이다.

이렇게 독서를 하면서 피로해야 한다거나 혹은 피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책 그 자체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책 읽는 마음이 책의 진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즐거운 독서는 단순히 책을 보면 우연히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올바르게 알고 배워야만 얻어지는 것이다. 독서하면서 피로를 느끼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단순한 열정만으로 책을 사랑할 수 없는 법이다. 설령 그렇다하더라도 사랑의 유예기간이 짧다.

책과 연애(戀愛)한 지 어느 덧 10년이 지났다. 그 사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두 아이를 키우며 세월을 보내고 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써 해야 할 일이 수두룩하다. 적게는 고장난 형광등을 깔아 끼우는 것부터 많게는 아이들과 하루 종일 놀아 줘야 한다. 그럼에도 책과 연애를 하고 싶어서 만사를 제쳐 놓기가 다반사이다. 아내가 오죽했으면 한 달 가까이 방치된 불이 꺼진 형광등을 손수 고칠 정도이다.

사람이 아닌 책이라고 해서 외도(外道)가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은 오히려 헛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책만큼 외도하기 좋은 것도 없다. TV를 보거나 음악을 듣기 위해 이것저것 전기를 설치해야 가능하다. 요즘은 꼭 집에서가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서 보고 들을 수 있지만 번거로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책은 다르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책은 무선으로 작동하는 가장 손쉬운 기계라고 할까? 이러한 기계들이 하나도 아니고 수 천 개가 있는 도서관은 그야말로 천국이다. 그래서 요리를 잘하고 마음씨 좋은 아내에게 솔직하게 고백하건데 나는 집보다 도서관에 눈이 멀었다. 이렇듯 밥알이 아니라 글씨로 배를 채워도 배고프지 않은 지 오래 된 일이다.

일찍이 영국의 대문호 세르반테스는 읽는 것을 좋아한 나머지 길거리에 뒹구는 종이도 모자라 휴지통을 뒤져가며 읽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18세기 실학자 이덕무(李德懋)를 생각할때마다 눈물이 더욱 아른 거렸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어린 시절 책을 읽고 싶은 마음에 그는 마당에서 놀다가도 햇살이 언제 방안으로 들어가는지 밖에서 조바심 때문에 어찌할 줄 몰랐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에게 이렇게 사는 것은 상식(常食)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남들처럼 살아야 상식으로 통한다. 남들이 상식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자신 만의 열정 때문에 고집하는 것은 외롭고 힘든 일이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체 사는 것보다 행복한 고통을 맛볼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마다 한숨을 내쉬는 것은 답답하다. 그 보다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찾아가는 것이 덧없는 인생에서 지지 않으려는 괜찮은 방법이다.

내가 책과 한 몸이 되고 하나의 인생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저만큼 바라보기만 하던 이덕무의 삶이 뿌뜻함을 안겨주었다. 이덕무는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보는 바보라고 했다. 그의 만만치 않는 삶을 보면서 이것이 따뜻한 위로라고 한다면 위로이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간서치가 되는 것이 연애에 있어 사랑과 눈물이다. 하지만 연애는 찐해야 한다. 찐해야 달콤하다. 이덕무는 책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사랑을 하며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오우아거사(吾友我居士)라고 노래했다. 풀이하면 ‘내가 나의 벗이 된 사내’라는 것이다. 남들보다 책을 좀 읽는 편이지만 여전히 책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시절에 오우아거사는 비로소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뭔가 가슴을 뭉클거리는 게 있었다.

그래서 일까? 그동안 나를 달리 표현했던 많은 닉네임을 지워버리고 이번에야 말로 ‘오우아’라는 말이 평생 내 인생의 반려자가 되었다. 이덕무에 대한 나름대로 동정심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글자에서 풍기는 향기에 은근쓸쩍 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짧은 세 음절에는 안이하게 일상의 길을 걷는 이름, 대충 장황하게 설교를 늘어놓는 이름, 무표정한 이름, 왠지 모르게 두려움이 잔뜩 묻어있는 이름, 남이 듣기 좋으라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이름들을 산산히 부서지게 한다. 생각해보면 좋은 이름이란 가볍거나 무겁거나에 있지 않았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와 꼼꼼하게 대화를 하고 싶은지 혹은 이 세계를 강렬하게 바라보려고 하는지 웅숭깊은 이름이어야 한다.

어쩌면 이름을 짓는 것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일지 모른다. 독서의 어려움에 있어 책 고르는 일 즉,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도 쉽지 않은 고민을 해야 한다. 동기부여 연설가이자 작가인 찰스 존스는 이렇게 말했다. "두 가지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5년이 지나도 지금과 똑같을 것이다. 그 두 가지란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 읽는 책이다.”

고백하건데 나는 이런 책을 좋아한다. 먼저 첫인상이 강렬해야 한다. 첫인상은 책의 제목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가령,『황금가지』,『타고난 반항아』 같은 책들은 한 번쯤 읽어보게 한다. 안 읽으면 두고두고 후회스럽다. 때로는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200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 같은 타이틀의 책을 만날 수 있다. 이 둘의 첫인상의 차이점이라면 내가 책을 고르는 것과 책이 나를 고르는 경우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서점에 가보면 전자가 스테디셀러라면 후자는 베스트셀러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엄마 같은 책을 와락 포옹한다. 엄마는 누구나 다 알고 있듯 사랑에 있어 누구보다도 아름답다. 질긴 고기를 다져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며 집안 구석구석을 물걸레로 닦는다. 아플 때 엄마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엄마’라고 부른다고 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얇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정겹다.

책의 첫인상을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책을 펼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작 책의 내용이 너무 설명적이거나 끝가지 읽는데 힘들게 한다면 엄마 같은 책이 아니다. 더구나 너무 현학적이거나 개인적인 넋두리를 늘어놓거나 볼품없이 크기만 자랑하고 가격이 거만하게 높은 것도 엄이의 거리가 친근할 정도다. 더불어 애정이 넘쳐야 한다는 것은 남들이 하는 말을 그냥 따라하는 것은 아니다. 영어 사전을 보면 철자법에 따라 live(살다)가 먼저이고 love(사랑하다)가 나중이다. 하지만 우리를 사람답게 하는 데 있어 평범한 책은 살면서 사랑하게 한다. 반면에 엄마 같은 책은 사랑하며 살아가게 한다.

마지막으로 책 속에 숨겨진 비밀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에 있다. 다시 말하면 책읽기의 딜레마이다. 아무래도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발견하려면 책의 장단점을 파악해야 한다. 무작정 읽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며 피곤할 뿐이다. 이권우는『호모 부커스』에서 책읽는 방법을 감각적으로 전달해주고 있다. 그 하나는 ‘비타민적 읽기’이다. 당장의 효과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은근짜하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읽기를 가리킨다. 반면에 다른 하나는 ‘아스피린적 읽기’이다. 빠르게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실용적인 독서이다. 이 두 가지 종류에 따라 나는 책읽는 속도를 조절한다. 즉 전자는 천천히 곱씹으면서 읽고 후자는 빠르게 곱씹지 않으면서 읽는다. 그렇다고 어느 하나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한 권에 담긴 지식과 실용에 따라 어느 것이 80%이고 어느 것이 20%라는 전략이 다를 뿐이다.

책과 연애하면서 책을 사랑하는 것 못지않게 삼색(三色) 볼펜- 빨강, 파랑, 검정-를 사랑하게 되었다. 볼펜을 쓰기 전에는 0.5mm 샤프 펜을 주로 글을 쓰는데 사용했다. 하지만 샤프 펜은 매번 샤프심을 갈아야 한다는 것, 쓰면서 자주 샤프심이 부러진다는 것이 달갑지 않은 문제꺼리였다.

그런데 볼펜의 미학(美學)은 달랐다. 단순한 잉크 색이 아니었다. 볼펜의 촉감은 그대로 서권기(書卷氣)를 전달하였다. 글을 쓰면서 예전에는 몰랐던 글씨의 열정이 되살아났다. 굳이 볼펜이 삼색인 까닭은 검정은 책 읽는 느낌에 대한 서평을 쓸 때, 파랑, 빨강은 책의 내용이 끝나고 한두 장의 백지 혹은 색지 위에 메모를 할 때 쓴다. 또한 책읽는 부분에다 밑줄을 긋는 데 쓴다. 다만 파랑은 주로 인문, 과학 책들을 읽을 때이며 빨강은 소설, 에세이 책들을 읽을 때 사용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나는 밤늦게까지 독서를 하는 편이다. 밤을 까맣게 지새운다고 하면 어느 누구는 우습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바쁘게 사는 현실에서 맘 놓고 독서하기란 여간해서는 어려운 법이다. 마거릿 대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4-5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뭐라 해도 내 인생엔 일이 전부다. 어떤 사람은 살려고 일하지만 나는 일하려고 산다.” 나는 책을 통해 자잘한 일상에서 살아 있다는 느낌을 깨달으며 즐거워했다. 어쩌면 이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큰 행복이다.

고대 그리스 속담에 당신은 고슴도치인가? 여우인가? 라고 묻는 말이 있다. 고슴도치가 한 가지 큰 것을 알고 있다면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책과 동고동락했던 기나긴 여정에서 나는 고슴도치처럼 살아왔다. 그러나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한 가지 큰 것을 알 수 있는 법이다. 모름지기 책을 짝사랑해서는 안 된다. 고슴도치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여우에 대한 사랑도 독서의 올바른 방법이다.

되돌아보면 책을 좋아하는 괴짜 같은 주인을 닮은 내 작은 서재에는 읽은 책과 읽어야 할 책들이 서로 바짝 달라붙어 있다. 책이 상식(常食)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배고픔을 채우기기에 급급해서는 안 된다. 분명 서로의 마음이 가려울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책들을 긁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서로에게 갈퀴 같은 마음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참으로 갈퀴 같은 독서여야 한다. 그럴 때, 삶은 상식(常識)이 되며 속 시원하게 가벼워지는 것이다.

갈퀴, 오우아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