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읽은 김훈 작가의 소설.

 

소설<남한산성>을 읽고나서는 올림픽도로를 통해 중부고속도로를 지날 때마다 보이는 남한산성 이정표에도

소설 속의 남한산성이 다시생각났었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어도 그 시간, 공간의 체험을 하게 하는 소설은

삶을 한편으론 충만하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내 것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억들이 또한 낯설기도 하다.

 

소설<흑산>의 기억은 또다른 경험들로 나를 이끌 것 같다. 양화진을 지나는 강변북로와 올림픽도로에서 멀리

바라보는 절두산의 느낌은 출근길의 갑갑스러움이나, 퇴근길 붉은 노을 속의 무서움을 느끼게도 할 것 같다.

 

소설<흑산>은 1800년 정조 이산의 죽음전후를 배경으로 조선에 천주학이 전해지고 정순왕후의 집권하에

핍박받은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다. 정약용의 3형 정약종의 참수당함과 2형 정약전이 흑산도로 유배되어 사는 이야기와,

1형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의 백서사건을 배경한다.

 

소설 속의 배경으로 정약전의 유배지 흑산도가 주로 나오고,

천주교 핍박을 좇아 한양땅의 천주교인들의 삶과 황사영의 행적을 추적함으로 소설은 이어진다.

 

소설 속에 천주교人인 소작농의 아내 오동희의 기도가 세 번 나온다.

"(앞부분 생략하고)

... 주여, 겁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을(마음)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후략)"    

소설 속 반복되는 오동희의 기도는 핍박 속 절박한 애끓음같고, 궁핍한 민초들의 삶과 같다.

 

또한 16세에 진사시 합격으로 소년등고(少年登高)한 황사영의 과문 답지는 안개 속 같은 세상살이에 답하는 것 같다.

" 마음이 세상의 근본이며 세상의 동력이어서,

  시간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세상이 저절로 바뀌지 못하며,

  마음의 힘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60쪽)

 

소설 속 정약전이 흑산(黑山)을 자산(玆山)을 바꾸어 부른다.

너무 검어 무섭고 캄캄한 세상이 아닌, 흐리고 어둡고 깊지만 희미하게 빛이 있는 세상을 그리워한다.

"나는 흑산을 자산으로 바꾸어 살려한다" (337쪽)

 

두려움과 공포가 이끄는 세상에서, 마음의 힘을 따라 희미한 빛을 그리며 사는 세상,

김훈 작가의 <흑산>은 그러한 세상을 담백한 글자로 하얀 원고지에 꾹꾹 눌러쓴 것 같다. 

쓰리고 아픈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