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탄 살라딘』!

  내가 이 책과 만난 건 그야말로 우연이다. 신촌의 어느 헌책방으로 갔다가 이 책이 꽂혀있는 걸 봤다. '술탄 살라딘'. 이 간단한 책 이름이 너무나도 도발적으로 보이는 건 나뿐인가. 당장에 책을 사고 싶었지만 여윳돈이 없었기에 그러지 못했다. 애초에 헌책방으로 간 이유가 사려고 간 게 아니라 구경하려고 간 거니 말이다. 나는 다음에 왔을 때도 이 책이 있거든 반드시 사겠다고 마음 속으로 다짐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다음주에 또 갔다. 과연 남아있을 것인가. 남아 있었다. 당장에 샀다. 내가 하필 이 책이 있을 때 헌책방에 가고, 또 그 헌책방에서 하필 이 책이 꽂혀있는 서가를 구경하고, 또 이 책이 일주일 동안 안 팔리고 남아있을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야말로 이 책과 나의 인연은 우연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아주 기분 좋은 우연이다.

  나는 책을 후기부터 보는 습관이 있다. 이 빌어먹을 습관 때문에 추리소설을 볼 때 상당히 긴장감이 떨어질 때도 있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나는 이 책도 후기부터 봤다. 그리고 기대감이 더 높아졌다. 후기에 쓰인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이 책과 『석류나무 그늘 아래』 등 '이슬람 5부작'을 쓰려고 마음 먹은 것은 걸프 전쟁이 터졌던 1990년이다. BBC 방송에 나온 어떤 멍청한 논평자가 아랍인에게 문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분노했기 때문이다. 아랍 세계에 관한 무지가 뿌리 깊다는 생각에 나라도 뭔가 해야겠다고 느꼈다.

  나는 이 후기를 읽고 그에게서 진정한 지식인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이런 의식을 지닌 자라면 절대 누군가를 실망시킬 글을 쓰진 않겠노라고 생각했다.(사실 이 타리크 알리는 우리나라에서도 알게 모르게 꽤나 유명한 인물이다. 아마 『근본주의의 충돌』이라는 그의 유명한 저서에 대해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으리라.)

  『술탄 살라딘』은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었던 대략 1100년대 중·후반의 시기를 배경으로 작가의 창조적 상상력을 더해 엮은 소설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술탄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되찾은 이슬람 세계의 영웅이다. 실제로 그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이슬람 세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아마 잘 알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술탄 살라딘』은 살라흐 앗 딘의 영웅성을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작가는 의도적으로 살라흐 앗 딘과 거리를 둠으로 해서 살라흐 앗 딘 뿐만 아니라 샤디, 자밀라, 할리마, 이븐 야쿠브, 이븐 마이문 등 모두가 이 책의 주인공으로서 한 몫을 톡톡히 해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것이 왜 매력인지 이해할 수 없는 작자도 있을 것이다. 아마 지금 이 순간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글을 써본 사람은 알 것이다. 조연을 주연을 받쳐주는 '도구'로 전락시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힘든 조정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말이다. 그런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작가의 균형잡힌 시선과 함께 조연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도 필요하다. 조연을 하나의 '인간'으로서 비춰주는 것은 작가의 의식과 균형감각이 합쳐져야지만 탄생하는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인 것이다. 이 책의 저자 타리크 알리는 그러한 작업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아주 사소한 인물 하나까지도 세심하게 살피는 작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책의 더 큰 매력은 결코 감정으로 치닫지 않는다는 점이다. 타리크 알리는 독자를 웃기거나 울리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교묘하게 핵심을 슬쩍 피해가는 서술로 객관적 거리를 확보한다. 서술자 '이븐 야쿠브'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게 과연 '1인칭' 소설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물론 이는 현대 독자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불친절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런 불친절 덕분에 독자는 그가 전하는 인물들의 메시지를 더욱 뚜렷하게 들을 수 있다. 이는 『술탄 살라딘』이라는 소설이 갖춘 가장 큰 장점이자 매력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비단 '살라흐 앗 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와 그 주변 모두를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매력이 타리크 알리라는 인물의 역사적 안목과 버무러져 아주 농염한 분위기를 풍기는 섹시한 소설을 탄생시켰다. 이 책은 비단 소설로서의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처럼 『이슬람 사전』과 『코란 주해』나 읽으며 이슬람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다고 발버둥쳤던 과거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도 크나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