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면서 한국문학을 그리 즐겨 읽지 않는 나에게 있어 구병모라는 작가는 낯선 인물이다.

책을 받아드는 순간, 읽는 순간, 그리고 지금 이렇게 서평을 쓰는 순간에도 그녀에 대한 정보는 제로에 가깝지만

그녀에게 흥미가 생긴 건 자모의 공식리뷰단으로 선정되고 처음으로 받은 책에 대한 설레임 때문 아니고

또한 흥미진진하게 읽었기 때문 아닌 같은 구(具)가이기 때문이라는 실없는 이야기.

 

주입식 교육을 받아 창의력 없는 나는 책을 받아들고 무슨 내용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이

그저 어느정도는 의무감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내가 항상 접하는 일상적인 풍경과 다름없는

퇴근길 지하철의 끔찍한 장면 묘사에 지금, 여기, 서늘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음에 감사하며 몸서리를 쳤더랬다.

그러던 순간, '헙!' 하는 소리와 함께 동공이 커지며 나는 갑자기 무서우리만치 빠른 속도로 이 책에 빠져들게 되었는데

그것은 내가 공감하는 일상에 갑자기 던져진 조각의 비수 때문이었다.

 

조각.

그녀는 나이든 방역업자이다. 방역업이라 하면 끔찍스러운 바퀴벌레를 죽여주는 '세스코' 정도로 알고 있던 내게

이 책에서 의미하는 방역업은 나를 흠칫 놀라게했다. 무엇을 죽여주는 것 같긴 한데,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

여기에서 나는 한가지 의문점을 갖게 되는데, 왜 해충을 퇴치시켜주는 방역이라는 단어를 차용했냐는 것이다.

에이전시에서 의뢰를 받을 때는 이유를 불문하고 돈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인 경우도 다반사.

주변에서 예쁘고 착하고 잘났기 때문에 미움받는 이들을 종종 봐왔기 때문에 의뢰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꼭 쥐나 바퀴벌레 같은 해충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방역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어물쩡 넘어가기로 한다. 어쨌든.

 

그녀를 방역업으로 이끈 이는 류라는 인물인데, 그는 처음으로 조각을 필요한 '조각'으로서 받아들여준 이로

조각의 마음에 가장 깊이 박힌 '조각'이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간 류를 언젠간 따라갈 터인데 그 날이 올때까지

그녀는 그저 그렇게 주어진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

류는 그렇게 말했다.

지켜야 할 것을 만들지 않기 위해 혈육까지 버렸건만 오래 살다보니 그녀는 자꾸만 명치 언저리에

무언가 걸린 듯한 존재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언젠가 방역업을 마친 귀갓길에 충동으로 데리고 온 개 '무용'이 그러했다.

업으로 삼은 일의 특성상 '다녀-온다'는 말이 결코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조각은 무용에게 '다녀-올게.'라고 말한다.

- 언제나 무용이 나갈 수 있는 문을 열어두고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 문으로 나가 살 길을 찾으라는 말과 함께.

"언젠가 필요한 때가 되면 너는 저리로 나가는 거다. 그리고 어디로든 가. 알겠니. 살아 있는데, 처치 곤란의 폐기물처럼

타는 쓰레기 안 타는 쓰레기로 구분되기 전에."

 

얼마 전, 방역을 나갔다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상처까지 입은 조각. 그녀의 실수를 침묵해주고

상처를 치료해준 강박사 또한 자꾸만 눈에 밟히는 존재이다.

 

이런 조각을 자꾸만 비아냥거리는 인물이 있었으니 같은 에이전시 방역업자인 '투우'였다.

그는 젊은 남자로 기술이 좋아 에이전시에서 가장 촉망받는 방역업자인데 이상하게도 이 늙은이를 만날 때마다

반말지거리로 시비를 거는 것이다. 그는 언젠가 조각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이로, 아버지의 죽음에서 달콤한 향기를 맡고

어떻게 그녀의 옷이나 얼굴에는 단 한 방울의 피가 튀지 않고 그토록 깨끗할 수 있는지 그것이 어떤 기술인지

진심으로 궁금해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방역은 그의 천직이 아니었나 싶다.

 

따라서 그는 '어쩌다 보니' 이 방역업에 종사하게 되었을 뿐 아버지의 정수리에 구멍을 낸 여자에 대한 복수심이나

다른 거창한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녀에게 집착하는 것은 그저 천진스러운 '궁금증'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 아버지를 죽였지만, 그녀는 정성스럽게 약을 빻아 챙겨주었고 베란다에 걸터앉은 그녀의 등에서는 금방이라도

날개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 여인은 누구인가. 그녀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미움이나 증오보다는 천진함이 서려있다.

'나를 알아 줘. 나를 기억해 줘.'

이것은 사회성이 부족한 그의 관심의 표현이었을까.

어린 아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치마를 자꾸만 들추는 것처럼 짖궂은.

아마 투우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여전한 조각을 보며 안심했던 것 같다.

늙어 기력 빠진 이 늙은이에게 조금 실망할 뻔 했었으므로.

'이제 됐어.'

 

지켜야 할 것들을 떠나보내고 그녀는 이제 주어진 상실을 살아간다.

항상 자신의 존재를 숨겨 평범해야 했지만, 이제는 남은 한 손에 예쁜 색도 물들였다.

 

혹 누군가 이 글을 읽고 책의 내용이 너무 많이 노출되어 읽어봤자 재미없겠다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숨막히고 박진감 넘치는 긴 문장들, '음-'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비유적인 표현들 - 예를 들어,

'조각은 최소한 신뢰를 크게 잃은 채로 떠나고 싶지 않을 만큼은 이 일에 애정이 있었는데,

대놓고 애정이라고 하기엔 이 일의 성격상 좀 뜨악한 표현이고 몸을 움직여 일하는 데에 대한 집념이나

원년 멤버로서의 집착 내지는 나 아니면 할 수 없단 식의 고집이라고 부르기에도 적절치 않은,

말하자면 탯줄과도 같은 감정이었다. 그것도 간신히 영양을 공급하다 불현듯 아이의 목을 단단히

감아버린 탯줄로, 언제 죽음으로 이어질지 모르는.'(p.92) - 이 더해져 그대들을 자신도 모르게 빨아들일테니.

 

'방역업을 시작한 뒤로 삶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 아닌 현재멈춤형이었다. 그녀는 앞날에 대해 어떤 기대도 소망도

없었으며 그저 살아 있기 때문에, 오늘도 눈을 떴기 때문에 연장을 잡았다. 류를 가끔 떠올렸고 그가 생전에 주의를

준 사항들에 자주 이끌렸지만, 류를 생각하면서 온몸이 뻐근하게 달뜨고 아파오는 일이 더 이상 없었다.

그녀는,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