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몇 줄의 행간사이로 많은 의미를 담아내는 시는 후루룩 넘어가는 국수처럼 쉽게 읽기도 하지만 읽는 것만으로는 남는 것이 없는 듯 하여 딱이 많이 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언젠가 시가 유행을 탔을 때 (이렇게 표현해도 되나? ^^) 원태연, 도정환, 서정윤, 류시화씨의 시집을 한권정도 소장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나는 특히 서정윤님의 홀로서기란 시집을 좋아했었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말이다.

 

삶이란 무엇일까? 책의 마지막에 담겨 있는 소설가 박경리의 젊은 시절과 일상사진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돌아가시기 전의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그녀의 젊은 시절의 사진들은 삶의 무상함을 느끼게 만든다. 왜 생각지 못했었을까 이 대단한 작가에게도 꿈이 파란 시절이 있었음을...토지의 작가로 잘 알려진 박경리 선생님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를 읽게 된다. 지난달 돌아가신 고인의 49재에 맞추어 출간된 시집속에는 미발표시 36편과 4월 현대문학에 기고했던 시 3편등 모두 39편이 수록되어 있다. 오랜만이다. 한 사람의 온전한 일생을 다 담아 낸 듯한 박경리 선생님의 시집을 읽노라니 선생님의 시 속에 젖어 감상을 한 만큼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를 읽으며 고인의 삶을 100% 이해한다면 거짓말 이겠지만 구절구절 그녀가 들려주는 고단했던 현실 속에서 버리고 갈 것만을 남겨 홀가분하신 흙과 생명의 작가의 모습을 들여다 볼수 있다.

 

한국문학사의 큰 획을 그는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5년간 집필된 대하소설이다.  윤씨부인,별당아씨,서희로 이어지는 세대와 주변인물들을 통해1980년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민중의 삶과 한 그리고 역사를 담아내었던 토지는 드라마로 세번씩이나 리메이크 될 만큼 멋진 소설이다. 그외에도 <김약국의 딸들>이나 <불신시대>등의 소설가로 기억되는 작가에게서 시를 발견하게 된 것을 뜻밖이었다.

어머니, 할머니에 대한 시는 잊혀져 가는 기억에 대한 잔재이고 진한 그리움이다. 지나온 시간에 대한 담담한 회한이고 진솔한 과거에 대한 고백이었다. 원주에 있는 토지문학관에서 하루하루 자신의 텃밭을 가꾸듯 일생을 이끌어 왔고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마음속에 담아 왔기에 화도 한도 이제는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 볼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었다. 마치 삶의 행복과 고통이 작품에 녹아 있듯 평생을 자서전과 같은 시집 한권에 담아 내었다.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하는 길을 서서히 준비해온 듯한 선생님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인다.  

 

얼마전 뵈었던 신달자님의 시에 대한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정년 후에도 소설이나 시를 계속 쓰실거냐는 물음에 "소설은 아직 모르지만 시는 물론 써야죠 . 시는 내가 죽을때까지 탐색해야 할 땅이니까요." 라는 말씀을 들었다. 작가들에게 시란 그런 존재인가 보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 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벌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 집 p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