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혼에 불을 놓아

   언제쯤 당신 앞에 꽃으로 피겠습니까.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 노을빛 바람이여,  봉오리로 맺혀 있던 갑갑한 이 아픔이 소리없이 터지도록 그 타는 눈길과 숨결을 주십시오.   기다림에 초조한 내 비밀스런 가슴을 열어놓고 싶습니다.   나의 가느다란 꽃술의 가느다란 슬픔을 이해하는 은총의 바람이여,  당신 앞에 "네"라고 대답하는 나의 목소리는 언제나 떨리는 3월입니다.  고요히 내 혼에 불을 놓아 꽃으로 피워내는 뜨거운 바람이여.   - 112페이지

   기다리는 행복

   온 생애를 두고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수수한 옷차림의 기다림입니다. 겨울 항아리에 담긴 포도주처럼 나의 언어를 익혀 내 복된 삶의 즙을 짜겠습니다.  밀물이 오면 썰물을, 꽃이 지면 열매를, 어둠이 구워내는 빛을 기다리며 살겠습니다.  나의 친구여,  당신이 잃어버린 나를 만나러 더 이상 먼 곳을 헤매지 마십시오.   내가 길들인 기다림의 일상 속에 머무는 나.  때로는 눈물 흘리며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오랜 나날 상처받고도 죽지 않는 기다림.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나의 소임입니다.   - 114페이지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건 예전에도 산 적이 있었지만 결혼전이라  어디로  사라져 버려 다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며 나의 가장 한창인 학창시절에 수녀님께서 출판하셨던 거라  출판년도에도 애착을 가진것이 사실이다. 2006년에 재 편집한 이 시집을 가까이서 늘 보며 하나하나 시 구절들과 시어들에 대해 다시 하나씩 새기면서 생각해 본다.   막상 책을 받아드니 그 제본이나 편집도 굉장히 깔끔하면서도 예쁘다.  틈틈히 맑은 그림도 볼 수 있으니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어떤 그림이 또 나올지 기대가 되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여느 책들과는 다르게 책표지에 윤기가 난다.  이런걸 양장이라고 하는 것일까?  책을 손으로 쓰다듬어 본 느낌도 매우 부드러웠다.  

내가 갖고 있는 이 시집은 특별히 볼수록 예쁜시집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딱 알맞게 도착한 책들.   그렇다고 염두에 두고 책을 주문을 했던 건 더더욱 아니기에 그런 것이지.   이런 나만의 이야기가 있단걸 그 누가 아시리.. 영 흔들리는 마음을 누가 잡아주었는지도 모르게 피정이 열리는 곳으로 향했던 것도.. 그날 이해인 수녀님의 손길이 느껴지는 색연필의 예쁜사인과 스티커 빨간 장미가 기도라는 글자와 함께 정겹게 시선을 끈다.  한눈에 봐도 수녀님의 정성이 이만저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1979년 봄에 출간 되어 2006년 가을에 다시 태어난.. ’내 혼에 불을 놓아’  부산 광안리 바다가 보이는 수녀원에서 라고 적혀있는 개정판 서문의 마지막 글들은 내 마음 속,  그 때 그 곳의 기억으로 데려다 주는 것 같다.. 마음 설레이게도..

 

민들레를 옮겨 보며  글을 마친다.

 

민들레

 

은밀히 감겨간 생각의 실타래를

밖으로 풀어내긴 어쩐지 허전해서

차라리 입을 다문 노란 민들레

 

앉은뱅이 몸으로는 갈길이 멀어

하얗게 머리 풀고 솜털 날리면

춤추는 나비들도 길 비켜 가네

 

꽃씨만한 행복을 이마에 얹고

바람한테준 마음 후회 없어라

혼자서 생각하다 혼자서 별을 헤다

땅에서 하늘에서 다시 피는 민들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