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그림보다 글씨에 집중하는 편이다. 그림책에서도 그림을 보지 못하고 글씨만 읽고 마니 그 책의 깊이와 감동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 같은 맥락에서, 궁궐이나 절이나 정자에 가서 현판을 보아도 그 건물의 이름이 무엇인가 하는 내용만 읽고 끝냈을 뿐, 현판의 모양이라든가 색감, 글씨 등의 형식을 보지 못했다. 그것을 새삼 느낀 것이 <현판기행> (2014, 김봉규 지음, 담앤북스 펴냄)을 읽으면서였다.

<현판기행>의 부제는 '고개를 들면 역사가 보인다'이다. 흔히 보는 글씨, 흔히 보는 현판이지만 잘 알고 들여다보면 그 안에 역사가 정말 있었다. <영남일보> 기자를 거쳐 현재 편집위원으로 재직 중인 저자는 기존의 저서들을 보면 우리나라의 예술과 문화에 애정이 많다.

 

우선 책 표지 사진에 있는 현판에는 '용산서원'이라고 쓰여 있다. 용산서원은 경북 경주에 있고, 잠와 최진립을 기리는 서원이다. '용산서원' 현판은 숙종의 명으로 17~18세기의 명필이었던 옥동 이서가 17세기 후반에 썼고, 1711년에 서원에 전달되어 걸렸다는 역사가 소개된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이 서원에 배향된 '잠와 최진립'의 삶으로 넘어가고, 이어 이서의 생애와 글씨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본문은 크게 정자와 누각, 서원과 강당, 사찰에 걸린 현판 이야기의 세 부분에다, 종가와 숭례문, 중국 자금성 등 특별한 경우의 현판을 더했다. 촉석루와 도산서원, 부석사 무량수전, 송광사, 통도사 등 익히 이름을 들어본 곳들이 많이 실렸는데, 이 책은 그중에서도 현판을 들여다봄으로써 당시의 역사와 문화와 사람을 함께 이야기한다. 안동 영호루에는 고려 공민왕의 글씨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가 함께 걸려 있고, 밀양 영남루에는 현판이 한때 300여 개나 걸려 있었다고 전한다니 그 규모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남양주의 봉선사에는 '大雄殿'이라는 한자 대신 '큰법당'이라고 적힌 우리말 현판이 정겹게 걸려 있고, 한 서예가의 다양한 필체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제는 서예가 특별한 취미로 멀어졌지만, 명필 한석봉의 사례처럼 글씨를 잘 쓰는 것만으로도 벼슬을 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현판기행>은 이처럼 잊혀가는 서예의 세계를 통해 문화의 향기를 느끼게 해주면서, 내용뿐 아니라 형식의 아름다움도 세세하게 일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