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생각나는 일기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방학 끝날 때마다 울면서 밀린 것을 한꺼번에 쓰던 숙제로서의 일기이다. 초등학교에서는 방학 숙제 외에도 매일 일기를 써서 담임 선생님께 검사를 받았던 기억이 있는데, 그 덕분에 일기는 내 개인적인 생각을 담는 것이라기보다는 타인의 검열을 받는 공간이라는 불신을 갖게 되었다. 거기에다 내 방이 따로 없었던 때라 내 일기를 훔쳐 보는 몰상식한 가족들까지 있었으니 일기는 내게 치유의 공간이 되지 못했다.

중학교 졸업할 때였나, 선생님께서 일기장을 선물로 주신 덕분에 회사 다니기까지 약 10년간은 드문드문이라도 일기를 썼다. 시간과 공간을 정하기보다는 빈 시간이 날 때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쓰는 식이라서, 사건의 피상적이고 일차적인 서술 위주로 진행될 뿐이었다. 그나마 언제 한번 밀리기 시작하니 그 빈 공간을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지금은 아예 일기를 쓰지 않고 있다. 방학 숙제처럼 매일을 채워서 어디에 제출하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부담갖지 않아도 되는데, 뿌리 깊은 숙제의 기억은 아직도 여전한가 보다.

또 하나는 아이를 가지고 낳고 키우면서 썼던 육아 일기이다. 그것도 아이가 두돌이 될 때까지만 쓰고 그 이후로는 게으름 때문에 그만 둔 상태이다. 지금도 어쩌다 한 번씩 읽을 때가 있는데, 매번 나아지는 아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덕분에 빙그레 웃게 된다.

 편두통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일기 쓰기를 시작하여 50년 넘게 일기를 써 왔다는 저자는 <치유의 글쓰기> (2008, 셰퍼드 코미나스 지음, 홍익출판사 펴냄)에서 일기의 가치를 재조명한다. 'WRITE FOR LIFE', 삶을 위한 글쓰기라는 원제처럼 일기 쓰기를 통해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는 방법들을 설명한다.

이 책에는 저자가 치유의 글쓰기 워크숍과 세미나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얻어낸 결과들이 많이 실려 있다. 여럿이 머리를 모아 만들어낸 결과는 현명한 지혜와도 같았다. 일기 쓰기의 육체적, 정서적, 정신적, 영적, 통합적 이점들을 먼저 이야기함으로써 일기를 써야 하는 당위감을 말한다. 글쓰기는 '자신이 성취한 것들을 가치 있게 받아들이게 하고, 인생의 전환기를 더 주의 깊게 성찰하게 하며, 과거를 탐구하는 데 도움을 주고 좀더 창조적으로 생활할 수 있게 도와준다'(19쪽). 그리고 이런 이점과 효과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하루에 20분, 90일 동안은 시도하라고 말한다.

그런 실천을 위해 종이와 펜, 장소와 시간, 소재와 마음가짐이라는 일차적인 조건들을 이야기한 다음, 글을 쓰기 위한 마음가짐들에 중점을 두어 이야기한다. 글은 그냥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상황과 마음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므로, 이 책은 효과적인 글쓰기 전략이 아니라 살아가는 전반에 대한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다.

기행문, 유언 편지, 음식, 꿈 이야기 등 다양한 주제들을 쓴다면 재미있게 이어나갈 수 있으며, 그 중에서 자기 자신을 좀더 소중하고 가치있고 따뜻하게 감싸게 될 것이다. 과학적으로도 그 효과가 입증된 치유의 글쓰기. '확실한 기억보다 희미한 기록이 낫다',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는 모 광고의 카피처럼, 글쓰기는 과거와 현재의 기록, 미래의 설계, 이상적인 자아의 실현까지 많은 일들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한동안 놓고 있었던 일기를 다시 손에 잡아야겠다. 사 두고 쓰지 않았던 일기장을 찾아서, 이제는 글을 제법 쓰게 된 딸과 함께 하루의 마감을 일기 쓰기로 해 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