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가끔씩 극장에 가서 두 시간 동안 영화라는 가상 세계에 푹 빠지는 호사를 누릴 때가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불이 켜지면 다들 일어나서 각자의 길로 가는데, 일어나기가 아쉬워서 미적대고 있을 정도로 가상 세계에서 벗어나기 싫을 때도 있다. 그렇게 극장 의자에 푹 파묻혀 앉아 있으면서, 떠나는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사는 걸까 생각한 적이 있다.

<영화처럼> (2008, 가네시로 가즈키 지음, 북폴리오 펴냄)은 8월 31일 일요일 저녁, 구민회관에서 상영한 '로마의 휴일'을 본 다섯 명의 이야기이다. 어떻게 살았고 어떤 계기로 영화를 보게 되었는지는 모두 다른데, 하나하나 영화 같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 본다.

다섯 가지의 이야기는 모두 영화 제목을 차용하고 있다. 태양은 가득히 (1960년 제작), 정무문 (1994), 프랭키와 자니 (1991), 페일 라이더 (1985), 사랑의 샘 (우리나라에는 '애천'으로 소개됨, 1954)라는 다섯 편의 영화 중에서 한 편도 본 것이 없어서, 영화 내용을 검색해 가면서 책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알아보는 재미도 있었다.

<태양은 가득히>는 가네시로 가즈키의 자전적인 내용인가 싶을 정도로, 조총련계의 민족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인 학교를 다니게 되었던 설정이 동일하다. 영화광 용일과 학창 시절을 함께 하면서 성장했던 '나'는 일본인 학교로 진학한 이후로 용일을 만날 수가 없었다. 용일은 사채업자의 부하로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들렸다. 예전에 '로마의 휴일'을 함께 보자는 용일의 전화를 거절하던 날 헌책방에서 '태양은 가득히' 원작소설을 찾아낸 나는 그간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소설가로 데뷔한 후 첫번째로 영화가 제작되는 현장에서 우연히 영화라는 동창을 만나 용일의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서 나는 용일과 함께 보았던 '대탈주', '정무문', '취권', '태양은 가득히'를 연속으로 보면서 용일을 추억한다.

영화가 전해준 용일의 소식은 아마 부고일 것이다. 그러니 내가 용일에게 선물했던 이소룡 브로마이드를 영화가 가지고 있겠지. 어쩌면 '로마의 휴일'을 함께 보자고 전화했을 때가 그의 마지막 나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태양은 가득히'에서 톰 리플리를 살려내듯 마음에 들 때까지 영화 결말을 다시 쓰던 용일과의 추억대로 소설 속에서 용일을 구해낸다. 태양빛이 넘실대는 미야코 섬에서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는 용일, 일하는 틈틈이 시간을 내서 열심히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용일, 아버지 없는 주인공들이 활약하는 액션 영화를 꿈꾸는 용일. 영화처럼 멋지지 않은가~

가네시로 가즈키만큼 재일교포라는 특이성 때문에 우리가 이력을 훤히 아는 일본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의 책을 몇 권 가지고 있지만 순위에 밀려서 아직 읽지 않은 마음 한편에는, 이미 일본인이 된 사람을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과대평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매개로 하여 사랑, 우정, 용기, 복수, 가족애 등을 고루고루 영화처럼 담아낸 이 책을읽으면서 가네시로 가즈키에 대해 그 입담과 따뜻함을 깨닫게 되었다. 액자에 담겨 당시의 기억과 추억을 간직하는 사진처럼, 영화는 함께 본 사람과 당시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다. 연애할 때 이후로 멀어진 극장과 가까워지고 싶다. 아니, 극장에서 보는 만큼의 감동은 없겠지만, TV에서 하는 영화라도 집중해서 보아야겠다. 이제 글을 읽었으니 '태양은 가득히'부터 찾아서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