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폐허 속에서 가득 찬 생명을 상상할 수 있는 곳, 비루한 역사의 한 귀퉁이에서 빛나는 생의 한 조각을 불현듯 발견하는 곳, 그래서 버려야 할 삶이란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곳, 생의 매순간이 생의 전부임을 깨닫게 되는 곳, 그곳이 박물관이다 (239쪽)

내게 박물관은 숙제이자 지루함으로 오랫동안 각인되어 있다. 작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의 체험학습을 위해서라도 박물관을 다양하게 가 보아야 하는데, 그 오랜 각인 때문에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다. 작년 초인가, 정말 오랜만에 갔던 미술관에서는 손에손에 필기도구를 든 아이들과, 아이들에게 쓸 것을 불러주는 엄마들 때문에 관람이고 뭐고 정신이 쏙 빠질 정도였다. 나도 앞으로 그런 대열에 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지레 피곤해졌다. 

그러나 <오후 2시의 박물관> (2009, 성혜영 지음, 샘터 펴냄)을 읽으면서, 박물관은 그렇게 공부와 숙제를 위해서 가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2시에 박물관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은 학업이나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의미하겠다. 삶의 치열함이 쏙 빠진 세상, 악다구니가 끼어들 수 없는 고요함 속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런저런 박물관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물건들의 사실적인 소개와 설명보다는 저자의 삶에서 이 물건들이 자리하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풀어낸다. 
역사와 미술사, 박물관 경영학을 전공한 그의 지식 덕분에 유물들은 좀더 깊은 곳에 숨겨둔 이야기를 꺼내놓고, 박물관 안에서 그는 어려서부터 쉰이 넘은 지금까지의 내밀한 삶들을 꺼내 보듬는다. 그러다 보면 '슬픈 영화를 본 후 눈물도 마르지 않은 채 백주 대낮으로 떠밀려 나왔을 때와 같은 난감함'(22쪽)이 밀려오기도 하지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밋밋한 인생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그가 인용하는 많은 싯구와 소설 구절을 통해 더 향기로워진 박물관 나들이. 박물관에 담긴 삶과 죽음, 그 사이의 많은 시간과 공간과 사람을 훑어보며 뮤지엄 테라피라는 생소하지만 풍요로운 분야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