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게으른 건축가의 디자인 탐험기> (2009, 천경환 지음, 걷는나무 펴냄)는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에 썼던 화첩의 표지 같은 갈색 거친 칩보드지에 천테이프로 책등을 감싸서 질감이 색다르다. 
표지에 적힌 제목에서 '게으르다'와 '천경환스럽다'라는 말의 뜻을 따로 설명하고 있는데, '게으르다'에서는 세 번째 용법인 '고민 없이 달려가는 것보다 멈추어 쉬거나 차라리 몇 발자국 물러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는 성향이 있다'가, '천경환스럽다'의 뜻인 '사소한 것에서 특별함을 발견하고 진지하게 해석한다'가 이 책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표지를 열면 낯익은 모눈종이가 두 장 나온다. 국민학교 실과 시간에 많이 썼던 모눈종이의 기억이 생생하다. 세세한 수치까지 중요하던 그 종이의 엄격함, 한 칸만 잘못 그려도 입체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었던 그 꼼꼼함이 생각난다. 

저자는 건축가, 디자이너라는 직업의 특성을 빌려 밀리미터, 센티미터, 미터, 킬로미터라는 길이의 단위를 사용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밀리미터는 몸에 닿아 있어서 신체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카메라와 사진기와 프라모델과 연하장을, 센티미터는 이제 손바닥에서 벗어나 몸 바깥으로 확장하는 세계의 물건인 왁스와 우산과 아크릴 스크린과 회의테이블과 지하철 풍경을 말한다. 미터는 그보다 더 나아간 환경을 뜻하며 길과 차량 진입 방지물인 볼라드와 지하철 풍경과 스튜디오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킬로미터는 '시간에 대한 고민'으로 규정하면서, 도시고속화도로와 동대문운동장과 가산패션거리와 노들섬을 말한다. 순서대로 보면 밀리미터-센티미터-미터-킬로미터는 나-대상-환경-시간이라는 개념의 확장이겠다. 

각 카테고리 안에는 그가 만들어낸 대상, 소품, 프로젝트 들의 이야기가 하나씩은 꼭 들어가 있어서 건축가로서, 디자이너로서의 일상을 느껴볼 수 있게 한다. 저자는 그런 전문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세계 여러 곳의 사례와 비교하면서 타당성과 개선점을 피력한다. 지금껏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공간과 소품들이 눈에 들어오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러나 문장에 중복이 많고 '~것 같다'는 구절이 많이 쓰여서 주관이 없어 보이고, 주관적인 서술을 반복한다고 느껴져서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