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빅셀의 전작인 <책상은 책상이다> (2001, 페터 빅셀 지음, 예담 펴냄)를 읽었을 때 그 짤막한 글들을 그냥 재미있게만 읽었을 뿐,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2009, 페터 빅셀 지음, 푸른숲 펴냄)를 대했을 때 반갑다거나 기대하지 않고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런데 그 사이 내가 많이 변한 것일까, 그의 이야기가 마음 속으로 쑤욱 들어온다.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는 일흔이 넘은 저자가 그간 살아온 삶에 비추어 현재를 이야기하는 깊이가 담겨 있다. '기다림을 기다리며', '작은 세상, 큰 세상', '내 고향은 어디일까?'라는 세 가지 카테고리 안에 담긴 38가지 이야기는, 손바닥 掌자를 쓰는 掌篇이라는 장르에 걸맞게 짧은 이야기이다. 커다란 줄거리가 없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기승전결이나 클라이막스가 거의 없이 차분하고 조용하다. 스위스라는 나라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의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여러 언어가 섞여 들리고 국경을 넘나드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현재와 과거가 경계 없이 넘나들면서, 지금의 노인은 금세 어머니를 따라가는 소년이 되어 천진난만한 눈망울을 빛낸다. 

그 자유로운 비행을 따라하기에는 내 나이가 아직 적지만, 그 한적하고 조금은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따라갈 수 있었다. 공동사회가 이제 사적으로 변해 의례를 잃어버린 현재에도, 연한 송아지 고기 스튜와 으깬 감자, 야채, 샐러드로 구성된 '일요일의 진수성찬'을 혼자 먹는 그 쓸쓸함에 공감이 간다. 언제나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이 삶의 전부라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는 것처럼. 그럼에도 그는 소녀의 질문에 동지의식을 느끼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마음이 열려 있다.
그러고 보면 독자가 얼마나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에 따라 책을 읽는 깊이가 달라짐을 새삼 느낀다. 그 잔잔한 여운을 누리게 되어서, 페터 빅셀을 다시 보게 되어서 참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