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쇼>, <빛의 제국>등으로 친숙한 김영하씨의 신작소설집이다. 10여개의 단편소설들을 엮은 책이라서 한숨에 독파하는 재미를 느낄 수도 있고, 머리가 아플 때 전후 없이 임의의 단편을 읽을 수 있는 여유도 느낄 수 있다.

그 중에 '로봇'을 간략히 소개한다. 여행사 직원으로 근무하는 여주인공 수경은 여행사 사장과의 은밀한 성적 거래를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그런 수경에게 한 남자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로맨틱한 방식으로) 순수하게 다가온다. 남자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남자는 뜻밖에 '로봇 3원칙'을 풀어 놓는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그의 SF소설에 밝인 로봇에 관한 원칙이라고 하는데. 제1조 인간을 해쳐서는 안된다. 제2조.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단 1조에 어긋나는 경우는 제외한다. 제3조. 위 두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수경은 당황한다. 이 무슨 뜬금없는?

남자와 섹스를 나누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수경. 그러나 로봇을 자처하는 남자는 메시지를 남기고 수경을 떠난다.

	아까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외치는 순간, 내 머릿속의 프로그램이 이제 단신을 떠나야 할 때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런 열정적 사랑은 인간인 당신을 해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내게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기 전에 내가 먼저 가야 합니다. 그래야 로봇 3원칙의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복정하는 것은 나의 운명.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내 기쁨. 어쩌면 그것이 내 유일한 존재이유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여, 당신이 무슨 명령을 내려도 나는 목숨을 걸고 그것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침내 당신을 해치는 것이라면, 당신이 평정을 잃고 위험에 몸을 던지게 하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만을 따를 수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나는 더 늦기 전에 당신을 떠납니다. 안녕, 내 사랑.
페이지 : 30쪽

이게 사랑의 보편적 모습이고 진리일까? 상처주고 상처받지 않을 수는 없을까? 깊어질수록 상대와 내가 함께 기쁠 수 있는 그런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퀴즈쇼라는 단편을 보면 '해봤어'라는 표가 나온다. 연인끼리 혹은 가까운 사람끼리 그 표를 꺼내놓고 항목별로 O표 또는 X를 쳐가면서 그 이유를 얘기하다보면 상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엑셀파일에 저장해 두었다가 언제 기회가 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