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촐라체>, <고산자>, <은교> 이 세 작품을 두고 작가 박범신은 갈망의 3부작이라고 했다. 세 작품을 모두 읽어 본 느낌으로, <은교>에서 느끼는 사랑에 대한 갈망이야말로 사람을 미치게 하는 종류의 참을 수 없는 갈망이 아닐까 싶다. 실제 소설의 주인공도 은교를 갖고 싶은 갈망에 들떠 연적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던가!

갈망을 부추기는 가장 좋은 요소는 바로 '강한 금지'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의 선악과에 얽인 이야기도, 판도라의 상자에 얽힌 이야기도, 아니 아주 가까운 우리 일상에서 아이들이 떼를 쓰는 것을 보더라도 금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에 대한 반발과 갈망이 강해진다는 걸 잘 알 수 있다.  나이가 들어 감히 사랑을 입에 담기가, 상대에게 표현하기가 낯뜨거운 나이에도 어쩔 수 없이 자라나는 사랑. 그 사랑의 상대는 순결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그런 순결한 상대를 재능 없는 사기꾼 작가인 제자가 가로챌려고 할 때 느껴지는 좌절과 분노와 극한 질투심.... 노인은 '섹스는 찰나적인 위로를 줄 뿐이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기도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일체감의 유무에 따라 찰나와 영원, 공허와 충만, 열패감과 자존감이 극단적으로 교차하는 동물적이고 하면서 신성하기까지 한 경험이 섹스라는 건 노인도 잘 알고 있다. 하니, 은교와 제자의 모습에 잠을 이룰 수 없는 건 불문가지.

	나는, 톨스토이처럼 사랑을 가리켜 '자기희생'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고, 오스카 와일드처럼 '성찬이니 무릎꿇고 받아야 한다'고 떠들고 싶지 않다. 만나면 따뜻하고 안 보면 조금 쓸쓸한, 그것이 나의 사랑이다. 사랑은 본래 미친 불꽃, 불가사의한 질주의 감정이라고 말한 건 선생님인데,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에 데거나 다리를 부러 뜨릴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꿈꾸는 사랑은 오래 앉아본 듯한, 편안한 의자 같은 것이다.
페이지 : 185쪽

위 글귀는 사랑에 대한 제자의 고백이다. 얼핏 우아하고 그럴 듯 해 보이지만, 곰곰 읽어보면 지극히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알 수 있다. 다치지 않고, 상처 받지 않고 단물만 즐기려는...

선생은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여성에게 있어 연애는 영혼으로부터 감각으로 옮겨가는지 모르지만, 남자에게 연애는 감각으로부터 영혼으로 옮겨 간다. 나는 그 무렵, 분명히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 은교에게 집어 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였다.
페이지 : 202쪽

어떠한가? 제자의 얼치기 사랑과 극단적인 대조를 보여주지 않는가? 노인의 심중에서 이런 고백이 나올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본인에게 있어 겨자씨처럼 생명력 하나로 농밀하면서도 우주처럼 광대한 것이 사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