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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의 수수께기> 시리즈, <거칠 것이 없어라(김종서 평전)>, <조선 왕 독살 사건>,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사도세자의 고백>,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등 대중적인 역사책을 저술해 온 이덕일씨의 책입니다. 비록 역사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조선의 승려는 북벌을 꿈꿨다>는 소설도 쓰신 분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분의 글과 관점 모두 좋아하고, 그래서인지 이 분의 多作이 고맙게 느껴집니다.^^

어제부터 KBS에서 <자유인 이회영>이라는 대하 드라마를 방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읽고 이 분의 존함과 삶을 처음 접했던 저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주변에 일독을 권해드리는 것일 뿐이었는데 방송을 통해 전국에 알려진다고 하니 오직 반가울 따름입니다. 조선침략의 전초전으로 치러진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은 승리하였지만, 어찌된 전쟁인지 승리한 일본의 전사자가 패배한 러시아보다 많습니다(물론 무식한 돌격전략의 결과물이겠지요). 승전한 아군이 귀국하는 항구에 자식을 잃은 분노한 시민들이 항의하기 위해 모여 들었지만, 2구의 아들 시신을 메고 온 개선장군 노기를 본 시민들은 조용히 돌아섰다고 합니다.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선봉에 섰던 사람을 찬양하는 취지는 물론 아닙니다. 서글프게도 noblesse oblige(지배층의 엄격한 의무)란 말은 우리 사회에서 일종의 ‘유토피아’가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를 실천한 사람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말은 결국 자조적인 한탄이나 타인에 대한 비난에만 쓰이고 있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감히 이 책의 주인공을 noblesse oblige의 귀감 그 자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1910년 12월, 망국의 치욕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6형제, 40며명의 식솔들이 건너갑니다. 이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 형제가 그들인데, 대대로 三韓甲族의 명문집안이었던 그들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실패를 보고 무력양성을 위한 전초기지를 만들어야겠다는 신념 하에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망명길에 오릅니다. 당시 그들이 처분한 재산가액이 40만원인데, 당시와 오늘날의 쌀값으로 단순 환산하면 600억원에 달하는 거금이라고 합니다. 1932년 죽기까지 이회영이 독립운동에 재산과 목숨을 바친 세월이 20여년인데,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무색하게, 망명 후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독립운동으로 모든 재산을 쓴 그는 일주일에 2-3끼를 끓이지도 못하는 극심한 가난을 겪고, 딸아이의 옷가지를 팔아 끼니를 때우면서 기운이 없어 북경의 빈민촌에 누워 있을 정도 였다고 합니다.

조선의 명문가이긴 하지만 이회영 집안은 소론 집안입니다. 아시다시피 조선후기는 노론의 일당독재가 장기적으로 시행되었고, 나라를 팔아먹은 게 바로 노론정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론 지배층은 한일합방 직후 일제가 지배층 양반을 회유, 포섭하기 위해 ’합방공로작’이라 하여 작위를 수여하자 노론 지배층은 작위에 감읍하였습니다. 이처럼 집권 노론이 나라를 팔아먹고 작위수여에 감읍할 때 이회영 일가를 포함, 이동년, 이상룡 등 망명을 단행한 이들은 모두 당시 정권에서 소외된 소론이나 남인 계열인사들이었습니다. 나라는 집권 노론이 팔아먹고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소론이나 남인이 독립운동에 나서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입니다.

6형제의 대부분은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30년대에 쓸쓸히 이국 땅에서 죽습니다. 물론 이회영도 포함해서요. 유일한 생존자인 이시영씨는 해방후 초대 부통령이 되었는데,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미온적인 조치에 격분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한 분입니다.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씨와 민주당 국회의원인 이종걸 의원이 이회영의 직계자손입니다.

이회영의 독립운동은 파란만장합니다. 우리가 역사책을 통하여 배웠던, 신흥무관학교의 설립자도 그이고, 고종이 승하하기 직전 전개되었던 고종 망명사건의 주모자도 그이며, 다물단이라는 테러조직을 만들어 일제의 밀정을 척살한 사람도 그입니다. 그는 40세가 넘어 망명하면서 아나키즘을 수용한 이후 죽을 때까지 아나키즘을 지지 옹호했던 보기 드문 독립투사입니다.
* 이회영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는 일제와 만주군벌의 탄압, 마적떼의 습격, 경제적 곤궁 등으로 안타깝게도 1920년 8월 폐교되었지만, 우리 독립운동 사상 최대의 성과로 일컬어지는 청산리대첩은 신흥무관학교가 없었다면 불가능 했습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의 6일간 일본군 1,200여명을 사살해 일제를 경악에 빠뜨렸던 청산리대첩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대거 가담하였던 것입니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보면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는데, 나이가 어려 원래 입학대상이 아닌데 김산이 울며 불며 떼를 쓰다시피 입학하였다고 합니다.

아나키즘은 그리스어의 anarchos에서 유래한 말인데, 없다라는 뜻의 an과 지배자란 의미의 arche가 결합하여, 지배자가 없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젊은 번역자가 이 말을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하는 바람에 아나키즘은 숱한 오해와 배척을 받게 됩니다. 사실 아나키즘은 우파 뿐만 아니라 극좌 공산주의자들로부터도 심각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나키즘은 자본주의 사회는 평등의 이름으로 공격하고, 공산주의 사회는 자유의 이름으로 공격해 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나키즘은 이 양자가 가진 50%의 불의에 대해 신랄하게 공격함으로써 인간을 속박하는 모든 억압체제에 저항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저자는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자유연합주의’로 부르자고 제안합니다. 아나키즘에 대한 또 다른 오해 중 하나가 이들을 단순한 테러리스트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무력항쟁은 불가피한 것이었던지라 테러단체의 결성은 좌우를 묻지 않고 이루어졌습니다. 우파 민족주의자 김구선생은 한인애국단이라는 단체를 통해 윤봉길 의사사건을 주도 했으며, 의열단이라는 단체에 공산당 계열의 사람들(김원봉, 김충창, 오성륜 등)이 적극 참여한 것도 사실입니다. 아나키스트들이 만든 다물단이나 남화한인청년연맹 같은 단체라고 달리 볼 것이 아닙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쓰신, 폭력적 저항을 통한 일제 강도의 박멸을 설파한 <조선혁명선언>은 다름 아닌 아나키스트 조직의 위촉에 따라 작성된 선언문입니다. 이책을 읽다보면, 박열, 백정기, 이을규, 이정규, 김약산, 유자명, 김종진, 정현섭, 엄형순, 오면직 등 목숨을 걸고 일제에 투쟁했던 숱한 아나키스들의 삶과 죽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크로포트킨(사회적 다윈주의가 제국주의 옹호에 사용된 것에 저항하여, 상호부조론을 집필하였고 그의 자서전은 세계 5대 자서전 중 하나라고 함)이나 오스키 사카에, 바쿠닌 등 외국의 아나키스들의 면모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지금의 국사 교과서에는 이 분이 소개되어 있는지 궁금합니다.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알려진 후 단재 신채호 선생으로부터 ‘찾지도 못한 나라를 팔아 먹었다는 점에서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라고 비판 받았던 이승만의 가당찮은 독립운동은 소개하면서도 일가 전체의 재산과 목숨을 걸었던 사람을 모른 체 한다는 게 과연 말이 되는지,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1932년 중국 본토에서의 독립활동이 여의치 않자 만주로 가던 중 대련의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12일간의 모진 고문 끝에 분사한 이회영의 삶과 죽음이 <자유인 이회영>에서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지 자못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