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일이 안개가 낀 것처럼 희뿌옇던 때가 있었다.
모든게 불확실하게만 보였다.

다만 언제나 아름다운 뭔가를 찾아 헤매이고,
어디서 주워들은 헤르만 헤세라는 이름을 막연히 동경하던... 그런 때였다.

그 시기에 서점에서 이 책을 샀다.
출판사도, 책 표지도 지금과 같지만
뒷표지엔 정가가 3,500원이라 찍혀있던 때.

이 책을 처음 읽으려고 했던 그 때...
아마 난 기껏해야 중학교 1,2학년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 때는 아무리 이 책을 읽어나가려고 해도
글자 그 자체를 읽을 수는 있을지언정
이 글자들이 이어져 만들어내는 문장들이 어떤 의미인지
내게는 조금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결국 이 책을 읽는걸 포기했고,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나서 비로소- 이 책을 다시 집어들었다.
그리고 난 이제서야 이 책에서 말하려는게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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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원제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이다.
개인적으론 두 주인공의 이름을 딴 제목보다는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 쪽에 더 호감이 가는데,
책을 읽기전엔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고나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제목이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과도 의미가 통한다는걸 알 수 있다.
<지와 사랑>에서 ’지’를 상징하는 인물이 나르치스이고,
’사랑’을 대변하는 인물이 골드문트이니까.


마리아브론 수도원의 젊고 아름다운 수도사 나르치스.
그는 단지 외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을 한눈에 꿰뚫어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 나르치스 앞에, 아버지의 손의 이끌려 수도원에 온 골드문트가 나타난다.

명상가 나르치스와 몽상가 골드문트.
어딘가 닮은듯 하면서도 다른 이 둘은 둘도 없이 소중한 친구가 되지만
나르치스로 인해 자신의 본성에 눈을 뜬 골드문트가 수도원에서 도망치게 되면서
골드문트의 오랜 방랑이 시작된다.

골드문트의 아버지는 아들이 수도자의 길을 걷기를 바랐지만
나르치스가 한 눈에 골드문트의 예술가적 기질의 본성을 꿰뚫어보고,
마침내는 골드문트의 잠재된 본성을 깨운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이 책에서 골드문트의 방랑을 통해
사랑, 살인, 죽음, 출산 등등...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뇌했을법한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묘사했다.

서로 방법은 달랐으나- 명상가 나르치스는 수도원에서 명상과 사색으로,
방랑을 시작한 몽상가 골드문트는 삶의 한 복판에서 일어나는 파란만장한 일들을 겪으며,
각자 인생의 진리를 탐구한다.

다시 만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대화를 보면
때때로 이견을 보이며 대립하는가 싶지만
한편으로는 우정으로 서로를 갈구하기도 한다.

명상가와 몽상가로 ...
대비되는 모습의 두 인물을 그렸으나
결국은 명상가 나르치스도, 몽상가 골드문트도...
모두 인간의 참모습의 한 단면이라는 것.

나르치스로 상징되는 ’지’와,
골드문트로 상징되는 ’사랑’ ...
너무나 달라보이지만 사실 근본은 하나였던
’지’와 ’사랑’이 만나고 나서야,
헤르만 헤세가 그리는 인간의 참모습은 비로소 빛을 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