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잔잔하고 소소한 일상에서는 행복과 재미를 찾지 못하고 대개 불안하거나 우울했다. 그런 자신의 내부적 결핍을 외부에서 찾아서 메우려는 경향이 강했으며 그것은 늘 극단적 성취의 형태로 나타났다. 집착적으로 한 군데에만 모든 에너지를 불사르는 스타일이었다. 마치 찰랑찰랑한 뜨거운 물을 품에 안고 언제 엎어질지 모를 아이를 볼 때처럼 위태위태했다. 완은 유밍이 남녀 관계에서도 그런 자세를 취할까 염려스러웠다. 사귄다고 해도 오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100페이지(완이 아는 유밍)

담당 교수가 학생의 페이퍼에서 배울 점을 발견할 때나 주는 최고점 'HD'. 유밍은 지난 학기처럼 전 과목에서 'HD' 등급을 받았고, 유학생과 현지 학생을 통틀어 유례없는 일로 언어학과에서 천재로 취급받았다. 이런 유밍이 완을 점찍었다. 유밍은 불안하고 초조할수록 완에 대한 집착이 날로 커졌다. 무남독녀였던 그녀의 사랑은 오로지 완에게만 정조준된다. 유밍이 해주는 음식이 좋고 순수한 사랑이 좋지만 점차 버거워지기 시작하는 완. 반지를 사달라는 유밍을 떼어내기 위해 약속시한을 정해놓고는 서둘러 몰래 출국을 해버린다.

무엇보다 그녀의 가장 큰 미덕은 집착이 없다는 점이었다. 조르거나 애원을 하지 않고도 그녀는 대개 일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이해하고 아주 적게 용서하는 것이 그녀의 태도였다. 남을 자주 용서할 만큼의 분노를 만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결단력이 뛰어나서 한 번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완은 그녀의 그런 점이 늘 무서웠다. 161 페이지(완이 아는 수연)

'왜 나는 관계가 상처를 먹으며 성장한다는 것을 몰랐을까?' 193페이지

수연과의 신혼생활은 3년이 넘어도 행복한지 불행한지 알 수가 없다. 젤 먼저 포기한 건 음식. 아내는 음식을 잘하고 싶은 욕망이 없는 사람이요, 아무리 맛없는 음식도 투정 한마디를 안한다. 자신이 투정하지 않듯 다른 사람도 투정하지 않기를 바란다. 관대한 식성의 사람인지 미각에 둔감한 사람인지, 3년이 지나도록 빻아놓은 깨소금을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신혼 초를 제외하곤 섹스도 거의 하지 않아. 섹스 한 번 하려면 구걸+애걸+수모+치사가 늘 세트. 그러자면 달아오르던 몸과 맘이 다 식는다. 음식 잘 하는 여자가 맛있는 여자라 했던가. 유밍은 음식을 잘했다.

  "사고가 나던 날, 유밍은 집 근처 우체국으로 소포를 부치러 가던 중이었어요."

  "경찰이 소포를 열어보니 고향 사찰의 연등에매 달 소원 카드와...이해할 수 없는 건, 유밍의 소원이 뭐였는지 알아요?"

  "소원이 뭐였대?"

  "중국어를 해석하니까 애인과 히말라야에 가는 거였어요. 등산을 좋아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

  "모힙, 혹시......유밍에게 애인이 있었나? 남자 친구라든지?"

  "그런 남자가 있으면 제가 왜 그 고생을 했겠어요? 휴대전화 단축번호 1번이 연구실, 2번이 지도교수님이었어요. 그 애인이 누군지도 미스터리에요." 

  사망원인은 뺑소니 교통사고였고, 언젠가의 편지에서 유밍은 그랬다. 히말라야의 높은 봉우리에 완과 같이 올라, 커다란 무지개를 보는 소원을 매년 빌겠다고. 5년동안 이메일마저도 삭제한 나를 위해 유밍은 빌고 있었고...죄책감이자 자책감, 회한, 숨기고 싶은 비밀이자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은 과거가 짓눌러 반미치광이 상태가 되고...

수연이 본 완, 남편을 보는 아내의 입장.

수연은 완의 역량을 남들보다 먼저 알아본 만큼 완이 섬약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일찍 알았다. 연애 시절 완이 자신과 깊은 관계를 원하지만, 관계가 걔질 경우의 상처가 두려워서 고백을 기피한 점. 자신이 남들보다 더 가진 것을 덜어주면 완은 자신감을 얻고 담대히 재능을 꽃피우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만이었다는 사실을 수연은 결혼 후 머지않아 깨달았다. 뭔가를 원하지만 동시에 기피하는 완의 이중성격은 수연의 노력만으로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292 페이지

수연은 완을 곁에 두었으나 전보다 더 외로웠다. 동반자로서의 친밀감이나 따듯한 위로를 받고 싶어도 완은 수연이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다. 완은 태생적으로 그런 것을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완은 적극적으로 주는 것보다 머뭇거리며 받는 것에 익숙했다. 상대의 성장 가능성에만 방점을 둔 나머지 가장 진중하게 고려했어야 할 관계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탓이 컸다. 그러나 완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수연은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틀렸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293 페이지

도 긴 개 긴. 완은 불평이 없어서가 아닌 불평을 견디고 있었다. 수연 역시 완의 장점만을 보려는 노력과 자신의 위치에 어울릴 사람을 찾았음이라. 서로가 자신이 원하는 틀에 상대를 맞춰놓고는 잘 될거라, 잘 되기를 바랐던 지난 시간들. 무조건 내편이면서 나를 살게 하는 사람인 아내. '왜 나는 관계가 상처를 먹으며 성장한다는 것을 몰랐을까?'  뇌리를 뚫고 나온 이 말이 깨달음을 주었다.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라면 변화는 필연코  있을 것이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