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의 바램이 이루어졌다. 시리고 아려서 눈물 쏙 빼는 슬픈 소설을 읽고 싶다고 했는데 여러 권의 책이 스쳐가도 풀어내는 방식에 따라 강도는 달랐다. 가슴이 아팠고 모두다의 슬픈 마음주기에 동화되는 내가 있었다. 도가니의 표지는 따뜻한 희망을, 너는 모른다의 표지는 진분홍의 설레임을, 이 표지는 행복한 한 때를 연상시키는 편안함으로 다가왔지만 세 책의 내용은 다 반대였다. 처음 접한 작가의 책을 읽어가며 심기가 불편해졌다. 낯선 표현들이 이물감처럼 잘 적응이 안되는 가운데 우울과 짜증을 동반하는 아주 예민하고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자(누경)는 쥐면 바스라질 것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교사인 사촌언니(강우 엄마) 살림을 맡아서 해 준 사람은 누경 엄마였다. 강우 엄마가 죽고 새로운 가족이 생기자 강우는 누경네를 자주 왔고 병역의무를 위해 눌러 있은때는 누경이 12살때였다. 그리고 16살때 독감 걸린 엄마를 대신해 녹색 원피스에 하얀 양말, 여학생 구두를 신고 강우의 결혼식에 아버지와 함께 참석한다. 강우의 부모님이 눈물을 흘리자 누경도 눈물이 났는데 아버지에게 혼나면서도 눈물이 계속 난 건 그녀의 앞날을 예감하는 눈물이 아니었을까?

결혼식 다녀온 다음주 일요일에 예의 녹색 원피스에 하얀 양말, 여학생 구두를 신고 들판으로 나간다.  들판을 지나 풀밭으로 갔고 풀밭위에 누워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황홀경에 빠진다. 깨진 유리 주둥이를 목에 들이대는 낯선 손길에서...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버지는 누경에게 늘 강압적이고 늘 화만 내는 사람이 되었다. 심지어 돌아가신후 꿈에서까지 나타나 누경을 괴롭힌다. 누경이 아버지의 모습을 종종 발견하게 되는 강우를 운명처럼 만나진건 어릴적에 강우라는 씨앗이 마음 속에 자라난 것도 있지만, 어쩜 강우를 통해 아버지와의 화해를 시도하고 싶었던 마음이  무의식속의 자아가  움직였는지도 모른다.



<누경의 사랑>
1월3일 
 당신은 내 귀 속에서 잠을 잔다. 당신의 작은 기척에도 나는 놀라서 잠을 깬다. 당신은 어떻게 내 귀 속으로 들어왔을까......당신 안에서 나는 눈을 뜬다. 당신 안에서 난 잠이 든다. 나는 어떻게 당신 안으로 들어갔을까? 당신은 어째서 이 세상만큼이나 클까? 내가 세상에서 그만 사라져, 당신 안에서 사는 것일까. 다른 남자들, 친구들, 일, 백화점, 음식, 맥주조차 맛을 잃었다. 도무지 세상과 공명이 없다. 나는 유리되어 있는 것이다. 오직 기다린다. 내가 기다리는 것, 원하는 것은, 눈빛. 그 눈빛이 나를 보는 그 순간 속에서, 혹은 그 눈빛이 나를 본다는 약속 안에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 눈과 내 자궁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나는 선명하게 느낀다.ㅡ p133
사랑한다는 것은 완전한 합일이지요. 내가 그인지 그가 나인지 모르겠는 상태. 나와 그 이외엔 덜 중요하게 되는 상태. 오직 둘만이 알아가는 세상이라서 경이로움 그 자체지요. 누경이 보는 강우는 이랬지요. 누경이 알아가는 사랑은 이랬지요. 강우를 통한 내면의 자아를 세상보기 시키는데 한발자국 뗀거지요.  그건 아는사람이라야만 가능했던 아주 처절한 몸부림이었지요.


<강우의 사랑>
"인간은 오늘, 꼭 오늘, 그만큼 노력하는 바로 그 존재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난 나이들었고 오랫동안 내 인생은 공들여 쌓아왔어. 여러 사람이 걸려 있고 여러 일이 얽혀 있고 명예와 책임이 걸려 있지.  그건 무척 중요한 것이다. 진실보다 더 중요해. 아니. 그게 바로 진실이야. 삶 이외의 다른 진실이란 허약한 거야. 그래서 나는 참아. 참는 것이 힘들어."
"사랑, 나는 항상 그걸 참는다." p147
모든걸 다 갖을순 없습니다.  젊은날에 공들여 이룬 댓가가 현재라면 그걸 지킬 이유도 있어야지요. 사랑했지만 철저한 현실에 순응하며 철저한 현실인임을 자각하는 뼈아픈 통한어린 고백이지요. 소리없는 울부짖음이지요. 자신이 원하는 내면의 자아를 억눌러 자학하는 거지요. 용기없는 것하곤 다른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안간힘이지요.


<결국, 둘의 사랑이란>
당당하게 비겁하고, 결벽하게 표명하고, 가차없이 현실적인 것이 서운하지만, 그가 옳다는 것을 나는 안다. 우리는 이 현실에서 도망칠 수도, 극복할 수도, 초월할 수도 없다. 가장 순수한 의무란, 현실을 살아내는 것뿐이다. p147
불꽃처럼 한순간 타오른 사랑이 아니었다해도 불보듯 뻔한 현실을 어지간히도 둘은 힘들어 했다. 특별한걸 바라지 않았고, 더 나아가기를 겁나했으며,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너무나 가슴벅차게 지낸 죄(?)밖에 없다. 이들에겐. 상처받은 영혼들이 어린시절의 추억아래 가랑비에 옷젖듯 자신들도 모르는새 그렇게 다가갔고 만나진 것이다. 구두굽이 부러저서가 아니다. 누경은 성폭행의 과거가 다른 어떤이도 받아들일 수 없는 몸과 맘이었을때, 어릴때부터의 먼 친척인 강우는 편안함으로 다가왔고, 지극히 현실적인 강우는 인간적인 마음을 나눌 사람이 필요하던차 이십여 년이나 차이나는 누경과 교감한 것이다. 많이도 죄스러워하면서. 누경과 헤어졌어도 강우는 죽는날까지 그리움속에서 살 것을 안다. 평생 처음 맘을 준 여인이자 마지막 맘까지 준 여인이기에.  "우리 관계에, 내 생애에, 아니 내 심장에......"  얼마나 기막힌가? 그치만 그건 철저히 강우몫이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가 되어도 그건 강우몫일 뿐이다.


푸른 유리 속으로 맑고 격렬한 이네사 갈란테의 <아베마리아>와 기현의 순진하고 집요한 눈빛과 서강주의 자상한 미소와 상미의 명랑한 몸짓이 흘러들어갔다. p226
이젠 누경은 자신을 빚을줄 알게 되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줄도 알고 내면에 몸을 맡길줄도 안다. 큰 폭풍우를 만났지만 그래서 죽을만치 힘들고 힘들었지만 그래서 이기고 살아남았기에 눈부신 햇살이 더없이 귀한 걸 안다.  사랑이란 유리같은 것이란 걸 안다. 깨어지기 쉽다지만 그 유리를 녹여서 다시 더 단단한 유리로 태어날 수 있음을 안다. 
초록과 흰색과 노랑이 섞인 넝쿨무늬 갓등을 켜놓고 ㅡ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만든 선물이었던가. 강우를 위해서 만들었던건데...ㅡ가슴 아파하지 않는다. 예쁘다는 상미의 말도 담담히 받아들일 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