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는 말년에 쓴 자서전 <양파 껍질을 벗기며>에서 나치 시대에 무장 친위대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해 화제를 뿌렸다. 그는 전후 시대의 정치적·예술적 논쟁에 대해서도 정확히 기억했다. 한 기자가 “연세가 여든 가까이 되면 모든 게 희미해지지 않느냐”고 묻자 “내가 1996년의 일을 말하려면 이런저런 비망록을 뒤져야 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은 나이가 들면서 더 뚜렷하게 다가온다”고 답했다. 많은 이들이 그라스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나이와 기억력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기억심리학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사람의 뇌는 무엇인가를 기억하면서 새로운 흔적을 남긴다. 똑같은 것을 기억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최근 흔적이 활성화한 것이다. 따라서 가장 오래된 기억도 뇌조직 속에서 시간과 함께 여행하면서 수시로 새로운 복사가 이루어진다.

오래된 일일수록 또렷이 기억나는 ‘망각의 역현상’은 기억이 서너살 때부터 시작돼 20살에 정점에 이른 뒤 하강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피험자들에게 자서전적 추억을 기술하라고 요청하면 20살 무렵의 추억이 가장 많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책을 만나는 시기도 19세가 가장 많았다. 각자 자기 세대의 음악으로 꼽는 곡도 14·15살에서 20대 후반까지 들은 곡이다. 40대 초반을 겨냥한 광고를 위해 1980년대 중반의 유행가를 사용하는 건 이 때문이다.

추억은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인생의 어느 시기를 지나느냐에 따라 기억의 내용이 달라진다. 13살 소년의 아버지는 엄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소년이 48세가 되면 한층 너그러워진 자녀교육 방식의 영향으로 자신의 아버지가 엄격했다고 기억한다. ‘망각의 역현상’은 기억력이 퇴화하는 시기부터 활발하게 작동한다. 이는 기억의 재구성이 그만큼 활성화한다는 뜻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