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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침묵의 목소리를 깨우는 책

때로 내게 필요한 것은 침묵이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모두 차단하고 내 안에 북적거리는 감정들을 고요히 정리시킨 채 그 너머에서 미약하게 숨 쉬고 있는 작은 목소리에 집중하고 싶다. 그 목소리란 내게 여유와 휴식을 주는 침묵의 목소리다.

침묵이란 내 안에 일렁이는 수많은 감정들을 하나로 정리하기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이런 건지 저런 건지, 하루에도 몇 번씩 뒤틀리는 감정에 혼란스러울 때 차라리 침묵은 날 안정시켜 준다. 그러니 나는 진실로 현대 도시의 소음에서 벗어나 침묵으로의 여행이 필요한 사람인 모양이다.

‘침묵으로의 여행’이란 책을 만났다. 까만 바탕 위에 소박한 글씨체로 침묵으로의 여행이란 제목이 씌어있다. 안을 펼쳐보니 흑백 사진들과 글이 보기 좋게 배치된 포토 에세이다. 주로 수도원이나 한적하고 쓸쓸해 보이는 풍경 등을 찍은 사진들이 어쩐지 보는 사람의 마음을 묵직하고 경건하게 만든다. 현란한 색채를 쏙 뺀 흑백사진을 보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거라곤 그저 텅 빈 공간뿐이다. 그러나 어쩐지 그냥 허전한 사진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사진 속에는 정말로 ‘침묵’이 가득 찍혀있기 때문이다.

‘침묵으로의 여행’은 사진작가이자 사진평론가, 전시기획자인 작가가 여행을 하며 찍은 사진과 글을 담아놓은 포토 에세이다. 저자는 알프스를 중심으로 하여 스위스와 남 프랑스, 북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며 그곳에 있는 수도원들을 찾아다녔다. 수도원이라니...침묵을 찍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가 아닌가. 수도원 안에 잠들어있는 깊은 어둠과 침묵, 그리고 성스러움을 작가는 고스란히 사진 속에 담아냈다. 자신이 수도원에서 느낀 영성과 영기가 사진에서 느껴지지 못한다면 그건 사진으로 잘 포착해내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 말하지만, 내게는 작가가 느낀 성스러움과 영성을 느끼기에 충분한 사진들이다.

그의 여행은 스위스부터 시작된다. 스위스 여행의 중심이자 풍경의 중심이라 하는 루체른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수도원 여행을 시작한다. 스위스는 산이 많아서 수도원이 있기에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풍요로운 자연경관 속에서 기도하고 명상하며 은둔하기에 더없이 좋은 것이다. 사진에서 만난 스위스의 풍경이란 한적함과 고요함이 가득했다. 그 안에서 작가는 처음으로 엥겔베르크 수도원을 방문한다. 그곳을 시작으로 프란치스카 수도원, 베른 대성당, 아무 수도원, 생소뵈르 대성당, 아비뇽의 교황청 등 다양한 수도원과 성당을 방문한다. 가는 곳곳마다 성스러움과 침묵이 가득하고 작가는 그 풍경을 사진 속에 오롯이 담아낸다.

수도원 여행은 단지 수도원을 찾아가는 공간 탐색의 여정이 아니다. 수도원이라는 공간은 하나의 목표이고 좌표일 뿐 수도원 자체가 목적이나 의미인 것은 아니다. 매일 부딪히는 낯선 삶에서 아파하고 상처받고 위로하는 과정, 그리고 여행 속에서 내 안으로 품게 되는 성찰과 참회 속에 수도원이라는 장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 여행을 다시 돌아보니 ‘수도원을 찾아간’ 여행이었다기보다는 ‘수행’이 되어버린 여행이었다. 94p

‘침묵으로의 여행’은 텍스트가 적어 빠르게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느리게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빽빽하게 글자들이 나열된 두꺼운 책보다 더 천천히 읽어야 한다. 텍스트와 사진들이 남긴 하얀 여백을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그 여백은 호흡의 정리를 제공한다. 책 속의 사진 속에서 침묵을 만나고 하얀 여백 위에서 숨을 고르고 호흡을 정리하며 느릿하게 텍스트를 읽어나간다. 천천히, 천천히. 그러다보면 내가 미처 신경써주지 못했던 내 안의 침묵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떠남을 갈망한다. 그렇게 떠나서도 또다시 어딘가에 정착함을 원한다. 그리고 결국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온다. 떠남은 어쩌면 자기자리로 돌아오기 위한 긴 여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길에 함께 해줄 카메라와 내 마음을 담아줄 노트가 있다면 더없이 훌륭한 여행이 되겠지. ‘침묵으로의 여행’은 내게 또 하나의 떠남이었다. 비록 작가가 보고 느낀 걸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책으로나마 잠시 나는 침묵 속으로 떠난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래서 내게 책이란 어디론가 잠시 떠나고 싶은 갈망을, 그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위로받고 싶은 마음을 달래주는 소중한 도피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