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봐왔던 일본 소설 속 탐정이 아니라 미국 탐정을 보는 것 같다. 이름이 나오지 않는 '나'라는 탐정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꽤나 멋스럽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해서일까. 첨단장비 같은게 없이 오로지 두뇌와 몸으로만 사건을 추적해 가고, 풀어내는 과정 속에서 사람에 대한 정이 묻어나오는 게 참 멋있었다. '나'라는 탐정이 주는 매력이 워낙 커서 사건을 풀어가는게 묻히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렇다고 탐정이 실력이 매우 뛰어나거나 싸움을 잘하거나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탐정 이라기 보다는 타인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랄까. 분명한건 사무실을 내고 정식으로 사건을 의뢰받는 탐정은 아니다.

 

그날 저녁도 탐정은 거리의 호객꾼들과 인사를 나눈 뒤 즐겨 찾는 단골 바 '켈러 오하타'에 들렀다. 바텐더는 그를 보자마자 위스키 스트레이트 더블과 위장약 상자, 물 채운 텀블러를 내민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익숙한 동작으로 하는 걸 보며 탐정이 얼마나 이 곳에 자주 오는지를 알수 있다. 이 곳 말고도 삿포로 스스키노의 많은 바 를 들락거리는 탐정인지라 그와 연락을 하고 싶다면 바 에 전화를 하면 된다. 켈러 오하타를 시작으로 하나하나 전화하다보면 새벽이 되기전에 그와 연락이 닿을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대학 후배라고 소개한 하라다도 그를 만나기 위해 켈러 오하타를 찾았다. 동거하는 여자친구 레이코가 며칠째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며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는데, '나'는 이 부탁을 간단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자신은 탐정도 아니고 심부름센터 직원도 아니고, 무엇보다 별일 아닌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진지한 청년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지 못하고 어쩌다보니 떠안게 되었다. 귀찮은 일이지만 레이코의 흔적을 좀 조사한 다음 끝내면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간단해 보였던 실종 사건이 근처 모텔에서 발생한 살인사건과 관련이 됐다는게 밝혀지며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레이코의 행방을 알기 위해선 살인사건을 풀어야만 했다. 평범하지 않은 죽음 이었고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기에 괜한 일에 끼어든 셈이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몸을 사리려면 하라다에게 사건을 맡지 않겠다고 양해를 구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는 하라다의 순수하리만치 진지한 모습을 접하면서 레이코라는 여성에 대해(비록 사진밖에 보지 못했지만) 진심으로 걱정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따뜻한 마음은 사건을 다 풀고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발휘된다. 술 좋아하고 게임으로 돈 버는, 대학 중퇴에다 별다른 일도 없어 다른 사람들로부터 야쿠자와 혼동하게 만드는(정작 당사자는 야쿠자와 비교되는 걸 엄청 싫어하는데다 야쿠자를 경멸하지만) 한량처럼 보이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남자였던 것이다.

 

싸움은 곧잘 하는 것 같고 맷집도 좋지만 그래도 혼자 움직이기 때문에 흠씬 두들겨 맞을 때도 있고, 야쿠자로부터 위협도 당하고, 속으로는 벌벌 떨어도 겉으로는 침착해 보이는 모습이 인간적이라서 자꾸만 좋아진다. 스스키노를 무대로, 술집을 전전하며 술 한잔 마시고 정보 하나 얻으면서 싸우고 피하고 위협하고 당하면서 점점 탐정의 면모를 갖춰가는 '나'를 자꾸만 지켜보고 싶어진다. 이 시리즈가 계속 번역되어 한권씩 만나는 즐거움을 맛보고 싶은데,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건지 읽다가 막히는 부분이 생기는게 좀 아쉬웠다. 내 이해력이 딸려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난관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시리즈의 첫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