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홈즈,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한 때 추리소설에 빠져 살던 시절이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뿌연 새벽, 혹은 늦은 밤 중세의 도시와 기차, 고택 등을 누비며 단서를 모으고 복선을 찾으며 마치 내가 탐정인양 소설에 빠져 범인을 찾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미스터리 추리소설을 만났다.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이다.

 

주인공 스콧 핸더슨은 아내와 다툰 후 혼자 집을 나선다. 거리를 헤매다 무작정 들어간 술집에서 묘령의 여인을 만나 함께 저녁을 먹고, 공연을 본 뒤 헤어진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스콧은 아내의 시체와 함께 자신을 용의자로 지목하는 형사들을 마주치게 된다. 이제 그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선 범행시간으로 추정되는 시간에 그와 함께 있었던 묘령의 여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이것이 소설의 도입부이다. 시작부터 사건이 발생하고 주인공은 살인 용의자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이쯤 되면 유능한 탐정이 나타나거나 이 사건을 미심쩍게 생각한 형사가 나타나 그의 무죄를 입증하려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환상의 여인>에는 탐정도, 형사도 주인공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환상의 여인>뿐 아니라 윌리엄 아이리시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탐정과 형사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왜 작가는 탐정과 형사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일반인을 내세워 사건을 해결하려고 했을까?

 

이밖에도 <환상의 여인>은 추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몇 가지 더 있다.

스콧의 사형집행일을 20여일 앞두고 그를 가둔 형사는 주인공을 찾아와 아무리 생각해도 스콧이 범인이 아닌 것 같다고 자백을 한다. 그러면서 주인공의 무죄를 입증해줄 주변사람을 찾으라며 스콧을 재촉한다. 형사가 자신의 실수로 범인이 아닌 사람이 사형을 당하게 된 상황에서 자신은 맡은 일을 내팽개치고 주인공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돌아다닐 수가 없으니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는 말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주인공은 순순히 자신과 가장 친했던 친구가 혹시 도와줄지도 모른다며 그를 찾는다.

스콧 핸더슨은 왜 진작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 줄 유능한 변호사나 혹은 유능한 탐정을 찾지 않았을까? 꽤 오랜 시간 스콧과 그 여인은 도시의 거리를 거닐었다. 그런데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정말 단 한사람도 없었을까?

이처럼 이 소설에는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 숙련된 추리소설 독자라면 충분히 이상하게 생각할 여러 구멍들이 있다. <환상의 여인>의 해설을 맡은 소설가이자 영화 평론가인 듀나는 이 소설을 추리소설이 아닌 누아르에 가깝다고 말했다. 나도 그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코너에 몰린 주인공과 그의 힘없는 평범한 애인이 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모습은 전형적인 누아르 영화를 연상케 한다.

 

이처럼 이 소설은 추리물로서 즐기기보다 작품 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스콧의 애인과 그의 친구가 스콧의 무죄를 입증 해줄 ‘환상의 여인’을 찾기 위해 만나는 사람들(오케스트라 단원, 바텐더, 장님, 배우 멘도사 등)을 통해 인간의 다양한 모습(욕망)을 들여다보는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건’을 해결하는 핵심 열쇠는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아내가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왜 벌어졌는지, 왜 주인공은 범인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는지.. 주변 인물들의 욕망 안에 그 답이 있다. 이것이 윌리엄 아이리시의 소설에 탐정이 필요 없는 이유이다.

윌리엄 아이리시의 소설은 '어떻게 범인을 찾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왜 그는 범죄를 저질렀을까' '왜 그는 누명을 쓸 수 밖에 없었을까'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