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 중독자의 고백

 

이 책을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름 ‘책순이’로서 ,책이 좋아서 미칠 것 같은 마음으로 매일 책 사이트를 들락날락

거리는 내가 어떻게 이런 제목을 보고서 지나칠 수가 있으리. 나로서도 이 이상 읽어대면 중독일진대, 나보다 앞서 걷고

있는 책 중독자의 고백과 말로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심정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커다란 책방에 들어설 때의 그 끓어오르는 격정, 일상의 광기로부터 와락 잡아채져서 지성과 숭고한 이상이 자유로이

허용되는 좀 더 평온하고 제정신인 세계에 맡겨지는 듯한 느낌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거창한 책들을

사들여놓고 행복감에 느꺼워져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런 느낌들이 다시 내 것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말했다시피, 나는 안다, 내가 그랬으니까, 그리고 그런 일은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p12

 

소름 끼칠 정도로 나의 심정과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가, 책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장 나는 책 중독자인 그의

황홀한 책사랑 고백에 열렬히 동조하고 만다. 책을 고를 때, 인터넷에서 하나 가득 펼쳐진 온갖 책 광고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빠져버리게 되어 저도 모르게 좀비처럼 책을 장바구니에 주어 담는 소름끼치는 경험, 그도 나와 같은 ‘과’인

것인가,아니면 내가 그와 같은 ‘과’인 것인가,

 

-위대한 저작들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풍기는 냄새에는 사람을 몹시 취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책 가까이 있고

싶었다, 그 모든 것이 내 뇌에 곧장 스며들게 하고 싶었다.p13 다른 말이 필요 없다. 그의 말에 열심히 동조하며 박수를 칠

뿐, 그런데 이렇게 찬사를 보내면서 한편으로 궁금해지는 것이다. 책 중독은 과연 무해한 것인가? 아니면 치명적인 질병인가?

우선 책 중독의 증상들은 어떠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속으로는 나도 책을 좋아하지만 중독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자, ‘톰 라비“씨는 친절하게도 책 중독의 증상을 상세히 안내해 주고 있으니 자신의 증상과 비교해 볼 것. 먼저

신체증상 - 독서등이 없는 채로 누워서도 읽고 어두운 식당에서도 읽고, 덜커덕거리는 시내버스 안에서도 읽고 시에라 산맥

에서 배낭을 지고 걸으면서 불빛에 의지해서도 읽고 온갖 곳에서 책을 읽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나-p33 허걱, 당장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놀라우리만치(비록 시에라 산맥에서 읽어본 적은 없지만)나와 흡사한 증상이다.

 

생활환경-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그러지 않는 한, 결코 책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p37 (사방에 둘러져 쌓여 있는

 책을 보며 마지못해 인정의 한숨을 쉬게 된다)

 

가장 분명한 악영향은 우리 책 중독자들을 심히 빈곤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여기서 빠져나갈 길은 없다.p39 이미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몇 십 권을 담아두고 심각하게 버튼을 만지작거리는 내 모습을 보건데, 정말 나야말로 책 중독과 빈곤

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는 듯 보인다. 그래도 역시 혼란스럽다. 나는 진정 책 중독자인가? 증상만으로는 인정하기 어렵다면

그 다음 단계는 테스트이다. 테스트는 제3장에 나온다, 이런! 내가 체크한 점수는 13점.- 열두 문항 이상이면 당신은 바로

지금 협곡 벽에 비명소리를 울리며 공중에 떠 있다-p59 라는 진단을 받았다. 흑 절망적이다.

 

 

‘자. 그럼 톰 라비 씨! 알려주시죠. 저 같은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참, 책 중독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뭐에요?‘ 지금까지 읽은 바로 그는 자신의 책 중독을 고치길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 생각을 확실히 밝히지

않았다. 순간 그가 의심스럽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까지 읽어왔으니 멈출 이유가 없다. 제4장에 들어가면 돌연 그는

책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엉뚱하기 그지없다.(실제로 읽어보면 책의 역사에 대한 그 기발한 패러디에 웃지 않을 수 없다)

이 수상한 양반은 계속적으로 책과 관련된 사람의 분류를 읖조린다. 애서가, 장서가(수집광).., 역시 계속 읽기는 하지만

왠지 수상스럽다. 그래도 읽는다, 왜? 기발한 패러디 때문에.

 

 

배꼽 잡는 부분만을 뽑아 보고 싶다면 우선 [엘리트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책은 갖고 싶고, 읽기는 어렵다,

 자신이 책과 가깝다는 것을 알리고는 싶은데, 그 내용을 전부 볼 생각도 알 생각도 없다면, [엘리트처럼 보이게 하는

 모호한 표현 찾기 표]를 찾아 응용해 보자 (p140에 있다.) 너무나 모호해서 상대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며, 숨이 턱

 막히게 하여 당신을 우러러 보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것조차도 어렵다면 훨씬 더 쉬운 방법은 ‘훑어봤어요.’ 혹은

“대강 읽었어요”- 라고 대답하자. 이 대답은 큰 그림은 이해했지만 상세한 내용을 물으면 안 된다고 넌지시 답하는

 방법이다. 혹은 ‘지금 읽고 있어요’ -지금 현재는 책 내용에 대해서 답변할 수 없다는 암시, ‘어렸을 때 읽었어요“

- 읽긴 했으되 기억나지 않을 수 있다는 언급.(필경 이 세 가지 대답은 우리가 책에 대해 언제나 하던 대답중 하나일터)

 

 

이번에는 책 중독자들의 여행 가방 싸는 법을 들여다보자,

 

우리의 배우자들은 아마도 짐 싸는데 4시간은 걸릴 것이다. 그 가운데 3시간 58분은 본인의 양말, 셔츠, 속옷, 바지, 여성용

 바지 정장, 스리피스, 신발, 외투, 부츠, 그리고 갖가지 다른 옷들을 고르는데 든다. 그리고 각 품목을 두고 수혜 자격권을

줄이려고 하는 국회보다 더 깊고 면밀하게 따진다. 그런 다음 짐을 싸는 마지막 2분 동안에 일종의 덤처럼 무심히 책 한두

권을 던져 넣는다, 우리 책 중독자들의 우선 사항은 이와 다르다, 우리는 단 2분 만에 여행 가방에 옷을 모두 집어넣는다.

그런 다음 어떤 책을 가져갈지 결정하는데 3시간 58분을 들인다. p215

 

 

친절한 ‘톰 라비’씨는 계속해서 수많은 책 중독자들을 위해 책방에서 사 둔 수십 권의 책을 배우자, 혹은 부모님 몰래

무사히 집으로 들여가는 방법, 책을 보관하는 법, 빌려주기 싫은 사람에게 빌려주지 않는 방법, 그리고 빠르게 되돌려 받는

 방법까지(사실 엄청나게 쪼잔해 보이지만. 실은 이렇게라도 하고 싶은 방법들)아주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책 중독‘이라는 종교의 주교자리에라도 앉혀 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느 틈에 나는 책

중독자와 한 마음이 되어 버렸군)원하는 책을 살 수 있는 서점의 환경과 직원의 모범까지도 주장하고 있다. 아니 주장이

아니라 간절한 원함이다.

 

 

그런데 도대체 뭔가. 읽다보니 책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책을 살 수 있는 환경에까지 우리의 욕망을 고양시키더니만 그는

갑자기 책중독자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우리를 회유한다. 책 중독은 사실 치유하기도 어렵고 정작 당신이 치유를 원하기나

하냐는 식이다.

 

우선 사실을 말해보자,

첫 번째 사실은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치유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억제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조차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두 번째 사실은 우리가 치유되기를 원치 않는 한, 아무것도 효과가 없으리라는 점이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단 하나다, 걱정 말고 즐겨라, 책을 많이 많이 사들여라, 그래서 심한 곤경에 빠져

다시 책을 사고 싶지 않을 때까지.p267

 

 

넉살좋은 입담에 한방 먹은 기분이다. 그런데 좋다. 더 이상 고민하지 말자, 심지어 어떤 사람은 조개를 수집하고, 어떤 이는

우표를 수집한다. 사람마다 수집이 다를 뿐, 애서가이든, 장서가이든 실물로 존재하는 책을 수집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위태로운 출판 업계를 지탱해내는 훌륭한 독자의 자질일터, 평범하게 책 읽기 좋아하는 사람일 뿐인 내가 출판 업계까지

 운운하는 것은 책 뒷부분 그의 후기를 보면서 느낀 점 때문이다. 그의 진짜 책 사랑은- 책- 이라는 무한한 지성의 전당으로서의 그것이기도 하지만 평범한 우리들로서는 가장 가까운 서점에서 직접 손으로 넘겨가며 볼 수 있는 실물 책에 대한 사랑이다. 전자책들이 시시탐탐 책방을 무너뜨리고 컴퓨터 속으로 혹은 손안으로 들어올 기회를 노리는 현대에 책 중독자들의 책사랑,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지속되기를 바라는 그의 수상쩍은 [책사랑]에 나도 한표를 던진다. (어느 책 중독자의 고백- 은 실은 ‘어느 종이책 중독자의 고백’ 이었다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