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나라 말은 물론 어렵지만, 우리말 참 어렵다.

그래도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해나가기는 하지만 새로 발견하는 뜻과 말을 만나는 재미를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어렵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게다가 머릿속에서 뒤섞이는 게 늘 있는 일이다보니 그나마 새로 배우고 익힌 것도 잊기 일쑤다.

그래도, 우리말에 애정을 갖고 노동을 기울여 연구하는 분들의 성과를 만나는 일은 즐겁다.

특히 순수우리말에만 몰두하는 것도 아니고, 곱고 아름다운 말을 살려쓰자는 허허로운 글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역사와 사회 안에서 새로운 뜻을 얻고 쓰임이 달라지는 우리말을 조명해 낸 책 ’말들의 풍경’은 깊이 있는 맛이 느껴진다.

게다가 최근 신자유주의시대, 88만원세대 안에서 새롭게 뜻을 정리한 ’불안사전’이 갖는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게 만들어주기에 더 반갑다. 특히, 책 앞부분에 실린 ’표준어의 폭력’ 꼭지 말미에 실린 프랑스의 표준어는 ’불안사전’의 대척점에 서서 말의 사회성을 또렷하게 보여주어 재미있어 뒤에 붙인다.

-----------------------------

표준어의 폭력

 

“아무 걱정 마쑈, 위염이랑께요. 요 처방전 각고 약 지어 자시면 금시 낫어불 겁니다. 쩌그 약방 보이지라? 몇날만 지나면 암시랑토 안 헐 거시요.”

며칠째 복통이 계속돼 큰 병이라도 걸린 것 아닌가 걱정하며 처음 찾은 동네 병원에서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이 의사는 한국 최고의 내과의(內科醫)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환자는 불안을 말끔히 씻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배를 움켜쥐고 다시 다른 병원을 찾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이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표준에 규정 일관되게 서울말
서울말의 위세는 타지역 말보다 섬세해서도 아름다워서도 아냐
사용집단의 사회·문화적 힘이 결국 한 언어의 위계를 결정
표준어의 획일화 폭력 막아야

“아무 걱정 마세요, 위염입니다. 이 처방전 가지고 약 지어 드시면 금세 낳을 겁니다. 저기 약국 보이죠? 며칠만 지나면 아무렇지도 않을 거에요.”

이 의사는 사람 여럿 잡을 돌팔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환자는 이내 불안에서 해방돼 마음이 가벼워질 것이다. 심지어 아픈 배도 그냥 나아버릴지 모른다. 이 차이는 환자가 의사에게 보내는 신뢰의 차이에서 왔다. 그리고 그 신뢰의 차이는 의사의 말씨 차이에서 왔다. 한쪽 말씨는 흔히 ‘사투리’라고 부르는 비(非)표준 방언이고, 다른 쪽 말씨는 표준어다.

1988년 문교부가 고시한 ‘표준어 규정’에 따르면,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다.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총론 제2항은 표준말을 “대체로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규정하고 있었다. 55년의 사이를 둔 이 두 규정에서 눈에 띄는 차이는 ‘중류사회’에서 ‘교양 있는 사람들’로의 이행이다.

1988년의 언어정책 기획자들은 표준어에 좁은 의미의 계급적 장식보다는 문화적 치장을 더 베풀고 싶어했던 셈이다. 이 새로운 규정에 따르면, 표준어를 쓰지 않는 사람은 교양이 없는 사람이다. 새 규정의 ‘교양 있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문화적 위신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를 겨눔으로써 표준어의 매력과 구심력을 한층 키웠다.

1933년의 표준말 규정과 1988년의 표준어 규정에서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표준한국어가 일관되게 서울말이라는 점일 것이다. 한 나라의 수도에서 쓰는 언어가 그 나라의 표준어가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수도는 정치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흔히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표준 프랑스어도 파리 사람들의 언어고, 표준 일본어도 도쿄 사람들의 언어다. 게다가 한국의 서울 중심주의는 프랑스의 악명 높은 파리 중심주의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다. 서울로 이주한 지방 사람들이 서울말을 익히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시청각 매체가 사회 전체를 촘촘한 망으로 얽고 있는 오늘날에는 지방에 사는 어린이들도 흔히 서울말을 쓴다. 한 사회에 성차별(sexism)이나 인종차별(racism)처럼 언어차별(linguicism)이 존재하는 한, 비주류 언어(방언) 사용자는 주류 언어(방언)를 익혀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표준어가 다른 방언들보다 위세를 떨치게 된 것이 그 내재적 매력 때문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다시 말해 서울말의 위세는 이 말이 예컨대 강원도 방언이나 전라도 방언보다 본질적으로 더 섬세하다거나 명료하다거나 아름다워서 생긴 것이 아니다.

언어학의 지평에서는 서울말 역시 한국어의 한 방언일 뿐이고, 서울말과 다른 방언 사이에 위계를 설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서울말의 위세가 큰 것은 그러니까 언어 바깥 사정, 구체적으로 이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힘 때문이다. 한국어 방언 가운데 영남 방언이 비교적 패기 있게 서울말에 맞서고 있는 사정 역시 이로써 설명할 수 있다.

서울에 사는 영남 출신 화자가 쉽게 서울말에 동화하지 않는 이유를 영남 방언의 내재적 특질에서 찾으려는 견해가 있기는 하다. 그런 견해가 부분적으로는 옳을 수도 있다. 기실 영남 방언의 롤러코스터 억양이 서울말의 밋밋함에 이내 동화하기는 언어교육의 틀에서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영남 방언 사용자들의 사회적 힘에서 찾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현직 서울 시장을 포함해 역대 서울 시장의 다수는 영남 방언 사용자였고, 서울 강남의 고급 아파트 지역에서는 영남 방언을 듣는 것이 예사다. 서울에서 영남방언을 쓰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그리 불리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와 대칭적으로, 호남 출신 화자가 비교적 쉽게 서울말에 동화하는 이유 역시 언어 바깥에 있을 것이다.

방언들 사이의 위세가 그 내재적 특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방언 사용 집단의 사회적 문화적 힘에서 나온다는 것은 영어 내부의 권력지도에서도 드러난다.

미국에서 쓰는 여러 형태의 영어들은 영국 영어의 방언일 뿐이지만, 매사추세츠 출신의 미국인이, 특히 ‘교양 있는’ 미국인이, 영국으로 이주했다고 해서 런던 말투에 동화할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이 MIT나 하버드 출신의 미국인이라는 것을 런던 토박이 앞에서 드러내는 것은 당사자에게 조금도 불리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영국 영어 내부에서도 또렷하다.

런던은 영어의 중심 가운데 중심이지만, 흔히 R.P.(received pronunciation)라고 불리는 영어 표준발음을 내는 사람들은 런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주로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이다. 그래서 공인된 표준영어(Received Standard) 사용자들은 런던 시내보다는 이름난 사립학교들이 흩어져 있는 런던 교외에서 더 쉽게 발견된다.

이에 비해, 런던 일부 구역의 토박이들이 쓰는 이른바 코크니 영어(Cockney English)는 ‘천한’ 사투리로 간주된다. 이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주로 하층계급이기 때문이다. 표준 한국어가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의 언어이듯, ‘표준 영어’도 ‘교양 있는’ 런던 사람의 언어인 것이다.

‘교양’의 때때옷을 입고 표준어가 휘두르는 획일화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이, 예컨대 한국어 영남 방언의 예에서처럼, 꼭 표준어 사용자들과 맞먹는 사회적 위세를 업고 실천되는 것은 아니다. 코크니 영어 사용자들 다수는, 그 언어에 들씌워진 상징적 의미를 잘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그 ‘천한’ 언어를 사용한다.

호남 출신의 서울 거주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주류 언어에 동화하는 것을 제 정체성의 굴욕적 포기로 여기는 방어 본능 때문일 것이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표준 프랑스어에 동화하려는 프랑스인들의 욕망이 주로 중간계급에서 두드러지고, 상층계급과 하층계급은 유년기 언어에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런 저항은 ‘교양’과 흔히 등치되는 문학의 세계에서도 볼 수 있으니, 이를테면 서북 지방 출신의 시인 백석의 첫 시집 ‘사슴’은 서울 중심주의에 대한 문학적 저항을 드세게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표준어의 구심력은, 특히 문자세계에서, 거의 온전히 관철되고 있다. 서울말에 대한 최근의 문학적 저항은 이문구나 김성동 같은 작가들에게서 볼 수 있지만, 뒷세대 작가들이 그 저항을 이어나갈 것 같지는 않다.

문학적 욕망은 표현의 욕망이면서 한편으로 소통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백석이 ‘사슴’ 이후의 시들에서 서북 방언의 울타리를 상당 부분 걷어내 버린 것도 소통의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한편, 오로지 소통의 효율만을 꾀할 때 문학의 언어가 한없이 단조롭고 가난해지리라는 것도 명확하다.

이런 미묘한 상황은 문학 바깥 언어에서도 발견된다. 언어가 본디 소통의 도구인 한, 정보통신 분야의 끊임없는 표준화 시도가 당연시되듯, 표준어의 제정 자체는 불가피하다.

수많은 방언들의 대등한 경쟁은 그 원심력으로 한 언어를 이완시켜 마침내 소통 불능 상태로 분해해 버릴 수 있다. 그런 한편, 표준어가 한 언어 안에서 행사하는 패권주의는 그 언어의 표현 가능성을 제약해 결국에는 앙상하고 밋밋한 ‘국어’만을 남기게 될 것이다.

영어가 지구적 수준에서 실천하는 제국주의를 표준어는 한 언어 내부에서 실천하고 있다. 말하자면 표준어주의는 국민국가 내부의 제국주의다. 다른 많은 사회들에서처럼 한국 사회에서도, 시간은 방언들 편이 아닌 듯하다. 그것들이 ‘교양 있는 서울 사람들의 말’에 완전히 굴복해 역사의 뒤꼍으로 사라지기 전에, 다양한 형식으로 기록이라도 해놓는 것이 필요하다.

NAP-표준적인, 너무나 표준적인 방언

파리 16구의 오퇴유 구역과 파시 구역 그리고 서쪽 교외 뇌유는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다. 서울의 강남, 한남동 같은 곳이다. 이 세 구역 이름의 첫 자를 따, 이 지역과 이 곳 사람들을 흔히‘나프’(NAP)라고 부른다. 표준 프랑스어는 대체로 파리 지역의 프랑스어를 가리키지만, 나프의 언어는 일종의 방언을 형성한다. 이들은 말을 과장하거나 비틀거나 에둘러 사용함으로써, 자신들을 다른 지역에 사는 ‘보통 프랑스인’과 구별 짓는다.

현대한국어는 아직 이런 계급적 침윤을 덜 받은 듯하다. 필리프 방델의 ‘프랑스어-프랑스어 사전’에 수록된 몇 예. 왼편이 나프 프랑스어고 오른편이 표준 프랑스어다.

 

친구: 거의 모르는 사람

좋은 친구: 친구

사적인 친구: 주치의나 전담 변호사, 회계사

절친한 사이: 밥 한 번 먹은 사이

검소하다: 극도로 인색하다

먹고살 만하다: 매우 부유하다

사람들: 나프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우리 식구들: 나프

이주민: 이슬람교도

불행해지다: 오쟁이 지다

그 친구는 자식 복이 없어: 그 친구 아이가 마약을 해

걔들 문제가 많아: 걔들 이혼했어

말들의풍경, 불안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