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맛이 우러나는 동화이다. 동화에 ’깊은 맛’이라니 참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고 생각지 말기를 바란다. 먹거리의 편식이 위험한 것처럼 읽는 것에도 편식이 위험한 아이들에게 이런 ’깊은 맛’을 아이들의 눈 높이이에서 재미있게 엮어내는 동화작가가 있다는 것이 기쁠 따름이다.
어른들이 맘먹고 보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책과 노니는 집>은 천주학 책을 필사했다는 이유로 끌려가 장형을 맞고 그 독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둔 장이의 성장을 다룬 이야기이다. 졸릴 때마다 소리내어 읽으며 필사하던 아버지 곁에서 책을 처음 만났고, 붓으로 아버지의 글씨를 흉내내면서 글을 읽힌 장이는 책을 인연으로 아버지를 잃고 책을 인연으로 마음이 더욱 그윽한 미적이와 도리원의 볼우물이 이쁜 낙심이를 만난다. 책이 인연이 되어 종5품 홍교리를 만나고, 양아버지가 될 최서쾌를 만난다. 
책이 매개가 되어 사건이 벌어지고, 책으로 인해 위험과 곤란도 만난다.

<책과 노니는 집>은 의도적으로 생활상을 담아내려는 장치를 늘어 놓거나 노골적으로 교훈을 드러내지 않는다. 허나, 장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과 사람들, 장이와 나누는 말 속에 담겨 전해오는 사람들의 생각을 읽어내고, 벌어진 일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얻는다. 작가의 힘이다.

나이 어린 장이와 홍교리가 만나 교감을 나누고, 우정을 나누는 대목은 무척 인상적이다.

"책은 읽는 재미도 좋지만, 모아 두고 아껴 두는 재미도 그만이다. 재미 있다, 유익하다 주변에서 권해 주는 책을 한 권, 두 권 사 모아서 서가에 꽂아 놓으면 드나들 때마다 그 책들이 안부라도 건네는 양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지. 어느 책을 먼저 읽을까 고민하는 것도 설레고, 이 책을 읽으면서도 저 책이 궁금해 자꾸 마음이 그리 가는 것도 난 좋다. 다람쥐가 겨우내 먹을 도토리를 가을부터 준비하듯 나도 책을 차곡차곡 모아 놓으면 당장 다 읽을 수는 없어도 겨울 양식이라도 마련해 놓은 양 뿌듯하고 행복하다."

어린 아이, 그것도 양민의 아이도 아닌 천민의 아이를 앉혀 놓고 종5품의 교리가 하는 이야기이다. 그의 맑은 심성이 "서유당(책과 노니는집)"에 빼곡한 책들과 더불어 읽는 이를 감동케 한다. 책 속의 인물들은 딱 홍교리처럼 말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생각을 전한다. 곤경에 처하게 만든 장이 아버지에 대한 굳은 의리를 지키는 최서쾌가 엄격한 훈육으로 장이를 대하다가 천주학 책 때문에 다시 한번 곤경에 처할 장이 앞에 그의 사랑과 의리를 몇 마디 말로 드러내는 장면에서는 깊은 사랑에 가슴이 저려 절로 눈물이 흘렀다.

약궤책방 주인 최서쾌가 일을 하는 태도는 실리만을 좇는 오늘의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전한다. 책을 배달하면 책을 건네받은 사람이 하는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라는 이야기며, 그 책을 읽을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가며 책을 고르는 모습, 필사 연습을 하는 장이의 필사본을 뒤에서부터 검사하며 마무리까지 같은 정성으로 해내는 것의 중요함을 일깨우는 모습은 약쾌책방에 가득할 묵향과 어우러져 책 밖의 사람에게도 인격의 향기를 전한다.

책을 대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태도와 이야기를 만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수확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책 속 인물들이 말하는 책과 책 읽기의 가치가 더욱 도드라질 것이다.

"네게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답을 물을 책도 있고, 심심하고 답답할 때 재미를 줄 책도 있지 않느냐."

“간밤에는 무슨 이야기를 쓰셨어요?”
“우리에겐 밥이 될 이야기, 누군가에겐 동무가 될 이야기,
그리고 또 나중에 우리 부자에게 손바닥만 한 책방을 열어 줄 이야기를 썼지.”

돋보이려는 장식이나 기교 하나 없이 ’닭 곰탕처럼 담백하고 깊은 맛’을 내는 좋은 책을 만나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 책을 읽은 아이의 소감이 궁금하다.

아, 책 속 인물과 풍경을 아주 잘 살려 그린 김동성 씨의 그림도 일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