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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을 앞둔 봄, 떨리는 마음을 추스리기도 전에 그리움에 머리가 아파 한참 힘들어하는데 <고래>랑 이 책이 짠-하고 나타나 고맙게도 위로해줬다. 가볍게 읽고 싶어 <고래>부터 읽었더니 벌써 몇달이 지났는데 <상실의 시대>는 이제서다.

예전부터 무라카미 하루키의 명성은 익히 들었다. 하지만 정작 내 주변에서 강추하는 사람도 없을 뿐 더러 소문으로 듣자하니 그의 작품에 대한 평도 극과 극이더라. 결정적으로 표지가 썩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그런 선입견이 합쳐져 읽는 순서를 나중으로 미뤘던 것도 있었고, 실제 앞 40페이지 정도를 읽는데도 영 마음에 내키지도 않았다. 때맞춰 밀려온 노곤함에 까페에 자리잡은지 한시간만에 책덮고 자릴 박차고 일어났으니까.

그렇게 투덜대며 어떻게 다 읽으나 걱정하고 있는데 처음으로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 아니, 실은 세컨이 그 사람의 작품을 거의 읽어봤고 그의 패턴까지도 파악한 줄을 이제야 알았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바로 잡고 읽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 눈앞에 눈꼽이라도 한가득 낀듯 멍멍한 그의 문체가 어디가 좋다는 건지 궁금했다. 그런데 곧 그건 한순간에 불과했으며 그가 지속적으로 꿈속을 헤매고 있진 않다는 걸 알아버리곤 속도가 붙기 시작하더니 손에서 놓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게 급박하게 전개되는 씬도 없는데 아니, 도리어 천천히 진행하는데도 지루하지 않으면서 뒷장이 궁금했다. 내가 접했던 일본 작가들이 그리 많진 않지만 그들 특유의 분위기가 하루키의 소설 속에선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아는 그 특유의 분위기란 마치 별일도 아닌데 엄청 큰일인 것처럼 인물 하나의 감정을 부풀려 여러 장에 걸쳐 모호하게 표현하는 그런 것을 말한다. 작가의 말처럼 서양 소설의 영향을 받은 건지 그의 소설에서 작가를 감춰놓으면 일본일까? 서양일까?하고 궁금해질법도 했다.

다른 것보다 내가 더없이 이 책을 좋아하게 되고 계속 여운을 갖고 펼쳐보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나의 고민, 나아가 젊은이들의 고민을 그가 대신 해주고 있어서였다. 아마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좋아했으리라 믿는다.

세상에 어느 것도 두렵지 않을만큼 확신에 찼거나 자꾸 되돌아보며 놓았던 것을 다시금 잡게하는, 의심가는 그런 사랑들. 그들과의 관계가 동시에 놓여졌을 때의 혼란스러움과 조금은 이기적인 결정들. 그치만 그 누구 하나도 납득이 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그런 상황. 그리고 다시금 잃고 상처받고 아파했다가도 금세 잊고 새로운 사랑이, 사람이 내 안에 들어오고 그렇게 인생이 끝나갈 것임, 우리들 모두 언젠가는 그렇게 죽을 것임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모습들.

누구나 나처럼 이런 고민들을 숨이 찰듯 하고 있는걸까 궁금했던 찰나였는데 마치 내가 와타나베가 된듯, 레이코가 된듯, 나오코가 된듯, 미도리가 된듯 그렇게 줄거리가 흘러갔고 날 이해해주는 친구가 한명 더 생긴 듯 한장 한장에 정이 갔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바로 마지막.

	나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든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야기할 게 너무 많다, 이야기해야만 할 게 산처럼 쌓여 있다, 온 세계에서 너말고 내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너와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 무엇이 됐건 모든 걸 너와 둘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도리는 한참 동안 전화 저쪽에서 말이 없었다. 마치 온 세계의 가랑비가 온 세계의 잔디밭에 내리는 것 같은 침묵만이 이어졌다. 나는 그 동안 줄곧 유리창에 이마를 바짝 붙이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자기, 지금 어디 있는거야?"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랄 것도 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아무데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페이지 : 440

제작이 끝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에서 원작을 토대로 영화를 만들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읽는 내내 머릿속에 장면들을 떠올리긴 했지만 글쎄, 감정이입을 위해 한국배우들을 투입시키기도 했는데 잘 안됐다. 와타나베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도 실패했고. 아마도 내 머릿속에선 와타나베 성격과 부합되는 배우 자체를 못찾아 캐스팅에 실패한 것 같다. 그저 싱그러운 숲길 속 아미료에서 아련한 음악소리나 불빛, 위스키냄새 같은 것밖에. 어떠한 작품이 나와도 기대를 다 채워주진 못할 것이지만 그래도 나온다면 꼭 보고싶다. 그리고 다시한번 <상실의 시대>를 읽어야지.

	Norwegian Wood written by John Lennon I once had a girl, or should I say she once had me. She showed me her room, isn’t it good? Norwegian Wood. She asked me to stay and she told me to sit anywhere, so I looked around and I noticed there was’t a chair. I sat on a rug biding my time, drinking her wine. We talked until two, and then she said, "It’s time for bed." She told me she worked in the morning and started to laugh, I told her I didn’t and crawled off to sleep in the bath. And when I awoke I was alone, this bird had flown. so I lit a fire, isn’t it good? Norwegian Wood.

페이지 : 5

작가는 Sergean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120번 정도 반복하며 이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어째서 이 방대한 한권의 분량이 Norwegian Wood와 이렇게 잘 맞아떨어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물론 부제가 될 정도니 생각은 하면서 썼겠지만. 내가 네다섯살에 출간되어 이십년을 넘게 오해와 편견으로 피하고 하마터면 만나지 못할 뻔한 고개를 넘어 드디어 이제는 젊은이의 대열에 낀, 그런 나의 손에 이 책이 잡힌 걸 다행이자 행운으로 여기며 간직해야겠다. 그만큼 감동이 깊어 한동안 사귀었던 사람과 이별을 고하면 다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드는 것처럼 조금만 아주 조금만 여유를 더 갖고 이 책의 여운을 음미하고 싶다. 그리고 나도 기타를 치며 누군가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 그게 노르웨이의 숲이 아니라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