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초를 녹아내리면서

세월을 태워 나가는데...

푸르름도 익어 더운내가

제법 어른스러워지는 날인데...

자라내어야 하는것들은

익히고싶은 것들은

얼음으로 차가워져 버렸을까..

기다린다는거

언젠가라는 기대를 걸어두고 살아가는 일이리라...

 

 

   < 목차 >

 

* 책을 엮으며

제1부 오늘 같은 날

오늘 같은 날 - 이시영  / 버들 색시 - 박남준  / 산에 언덕에 - 신동엽

봄 산 - 홍신선 / 어느봄날 - 나희덕  /

가슴 안쪽에 생기는 나무 - 정영주  / 말의 힘 - 황인숙

가야산 - 권영진  / 꽃 - 백무산  / 대책없는 봄 - 임영조

다도해를 보며 - 마종기 

 

제2부 우주가 뭉클하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 풍뎅이 - 김수영

울음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 두루 불쌍하지요 - 정현종

줄 탁 - 김지하  / 산그림자 - 신경림  /  여름 한때 - 천양희

나는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 신대철

부처 - 김진경  / 바다의 엉덩이  / 새에 대하여 1 - 전원책

 

제3부 시를 가슴에 묻는다

아파트 사이로 수평선을 본다 - 이영진  / 서풍부 - 김춘수

옥루의 서 - 김관식  / 저는 시를 쓰지요 - 양애경

빨래 너는 여자  - 강은교  /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 정희성

도시의 펭귄 - 이동순  /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 도종환

유리창 -김사인  / 토하젓 - 박라연  / 칸나 -이문재

혼자가는 먼 집 - 허수경  / 손 -이윤화

묘지송 - 박인숙 

 

제4부 인간의 추억과 희망

웃음에 대하여 - 고은  / 국밥과 희망 - 김준태  / 목숨을 걸고 - 이광웅

동두천 - 김명인  / 아메리카 들소 - 윤재철  / 밤 - 나해철

청춘의 먼 길 - 이승철  / 예비군을 마치며 - 김형수

자본주의 - 장대송  / 살붙이 - 송기원/ 반성 100  - 김영숭

철길 - 김정환  /

 

제5부 詩로 얘기해주리라

30년 전 -서정춘  / 스승과 제자 - 채광석  / 어머니 - 박남철

고라니 - 최두석  / 똥지게 -심호택  / 인연 - 최영철

옴마 편지 보고 만이 우서라 - 서흥관  / 파안 - 고재종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 박철  / 나뭇잎배 - 나종영  / 관계 - 이정록

석우리2 - 홍일선  / 잃어버린 외투를 찾아서 - 송종찬

술에 취한 가오리가 내게 말하기를 - 김수열

 

 

	< 버들색시 / 박남준>   냇가를 따라 서 있는 수양버들은 하루가 다르게 그 맑은 연록의 색깔을 봄빛을 모아 치렁치렁한 머리 곱게도 빗어요 버들이 저처럼 단장하고 기다리는 서방은 누구일까 온다는 사람이 봄 다 지도록 소식 없는데 저 서방이나 되었으면.     <山에 언덕에  /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行人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 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 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 '4월은 갈아엎는 달' 이라고 노래하던 시인을 생각합니다. 조국이 외세의 침탈에 상처받고 있을 때 '살아픈 언어'가 아니 나올 수 없으며 그런 언어들만이 진정한 시에 이른다는 말도 생각합니다. 부여의 한 강변 시비에 새겨진 이 시에서 사람들끼리, 남북으로 갈렸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마음으로 서로를 애틋하게 생각하는 마음 하나씩 나누었으면 합니다.    < 봄 산  / 홍신선>   차꼬차꼬 그 자리에 무릎 꿇린 이제는 삐그덕삐그덕 옆으로 뒤트는 봉두난발 잡범처럼 끌려나온 그 불 산   질척대는 회음부 부근인가 저지대 습지인가 물오리나무 때들이 제 둥근 속 내부에다 번민처럼 기르던 바람 맑은 소리들을 목청껏 쏟아 놓는다 오오냐 오냐 다시 일어서마 오오냐 오냐 다시 일어서마 허공에 쏟아지는 그들의 멱을 따듯 수척한 노랫소리들 지난 겨울 폭설의 천 톤 눈에 멀쩡한 팔뚝들 숱한 가지들 타악타악 부러뜨려 내리고 목숨 아픈 듯 아프지 않게 건사해온.   오늘은 또 무슨 일로 곡간 같은 하늘문 활짝 열렸는가 햇살이 수천석 가마니짝들로 차곡차곡 들여 쌓인 그 휑뎅그렁 푸른 문이.   ==> 봄 산이 수상하다. 갑오농민군이 죽창들고 출현한 것 같기도 하고 '대책 없는 청춘 '들이 "하이 쌍, 미치겠네"라며 무엇인가 저지르기 직전이다. 그런데 그들이 무기로 들고 있는것이 산벚이요, 연초록 단풍나무니..... 그래서 시인은 그 '잡것' 들에게 '오냐일어서봐라' 격려나 해주는 것이다.   < 어느 봄날  / 나희덕> 청소부 김씨가 길을 쓸다가 간밤 떨어져 내린 꽃잎 쓸다가 우두커니 서 있다 빗자루 세워두고, 빗자루 처럼, 제 몸에 화르르 꽃물 드는 줄도 모르고 불타는 영산홍에 취해서 취해서   그가 쓸어낼 수 있는 건 바람보다도 적다   ==> 꽃이 가지로부터 이탈하는 순간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다. 벚꽃 진 자리, 목련 진 자리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크게 빈자리가 어딘지를 알게 된다. 김씨가 잠시 일을 멈춘 것은 그 빈곳으로 달려가는 우리네 인생을 본 것이리라. 하지만 그곳에서 인생의 뒤꼭지를 보는 순간 얼굴에는 영산홍이 피고 가슴에는 다시 뭔가 꿈틀대는 생의 활력을 얻는 것이리라.   < 가슴 안쪽에 생기는 나무  / 정영주> 봄이 가려운가 보다   엉킨 산수유들이 봄을 연신 하늘에 문대고 있다 노란 꽃망울이 툭툭 터져 물처럼 번진다   번져서 따스히 적셔지는 하늘일 수 있다면 심지만 닿아도 그을음 없이 타오르는 불꽃일 수 있다면   나는 너무 쉽게 꽃나무 길을 지나왔다 시간이 꽃보다 늘 빨랐다   오랫동안 한곳을 보지 않으면 그리고 그 한곳을 깊이 내려가지 않으면 시가 꽃이 되지 못한다   가슴 안쪽에 생기는 나무가 더 많아 그 그늘이 더 깊어   ==> 한 친구가 라일락꽃이 떨어진 것을 '처음 '보았다는 말을 했다. 생활은 늘 우리를 '가차없이 '끌고 간다. 우리가 너무 빨리 꽃나무 곁을 스쳐온 것이 아니라 우리만 늘 바빴던 것이다. 이 봄이 가고 나면 우리는 또 그런 말을 할 것이다. 어느새 봄이 지나갔다고. 사랑도 그렇다.   < 대책없는 봄  / 임영조> 무엇이나 오래 들면 무겁겠지요 앞뜰의 목련이 애써 켜든 연등을 간밤엔 죄다 땅바닥에 던졌더군요 고작 사나흘 들고도 지루했던지 파업하듯 일제히 손을 털었더군요 막상 손 털고 나니 심심했던지 가늘고 긴 팔을 높이 뻗어서 저런! 하느님의 괴춤을 냅다 잡아 챕니다 파랗게 질러 난처하신 하느님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지만 마을 온통 웃음소리 낭자합니다 들불 같은 소문까지 세상에 번져 바야흐로 낯 뜨거운 시절입니다 누구 짓일까, 거명해서 무엇하지만 맨 처음 발설한 것은 매화년이고 진달레 복숭아꽃 살구꽃이 덩달아 희희낙락 나불댄 게 아니겠어요 싹수 노란 민들레가 망보는 뒤꼍 자꾸만 수상쩍어 가보니 이런 ! 겁없이 멋대로 발랑 까진 10대들 냉이 꽃다지 제비꽃 환하더군요 몰래 숨어 꼬나문 담뱃불처럼 참 발칙하고 앙증맞은 시절입니다 나로서는 대책없는 봄날입니다.   ==> '봄 대책'이 있는 사람 나와보라고 해. 그러면 하늘의 천사들이나 결정적일 때도 침묵만 지키고 있는 '숨은 신' 외에 무엇이 나올것인가. 그렇지만 흰빛으로 포복하며 달려드는 조팝나무, 백목련, 배꽃, 찔레꽃, 그 눈부신 흰 꽃보리 앞에서는 질려서 눈을 감을걸, 우리네 봄은 모두를 '쥑인다고' 그래서 허리는 욱신거리고 어지러운 거야.       < 연蓮 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섭섭하게 ,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 생애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蓮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칠 전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 두루 불쌍하지요   / 정현종 > 두루 불쌍하지요 사람은 하여간 남의 상처에 들어앉아 그 피를 빨아 사는 기생충이면서 아울러 스스로 또한 숙주宿主이니   그저 열심히 먹어 부지런히 피를 만드는 수밖에 없지요     < 여름 한때  / 천양희 >   비 갠 하늘에서 땡볕이 내려온다. 촘촘한 나뭇잎이 화들짝 잠을 깬다. 공처가 물끄러미 길을 엿보는데 , 두 살배기 아기가 뒤뚱뒤뚱 걸어간다.   생생한 生! 우주가 저렇게 뭉클하다 고통만이 내 선생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몸 한쪽이 조금 기우뚱한다   바람이 간혹 숲속에서 달려나온다. 놀란 새들이 공처럼 튀어 오르고, 가파른 언덕이 헐떡거린다. 웬 기氣가 - 저렇게 기막히다   발밑에 밟히는 시름꽃들, 삶이란 원래 기막힌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나는 다시 숨을 쉿며 부푼다. 살아붐빈다.   ==> 뒤꿈치가 물렁물렁한 아이가 대지를 걸으면 새로운 길이 출현하며 동시에 우주가 중심이 잡힌다. 각각의 사물들이 일제히 경배하기 시작하고 시인도 예외는 아니다. 스톱모션으로 잡은 그 순간의 하늘과 땡볕, 나뭇잎과 공터가 아연 긴장하고 있다. 그때 우주라는 막연한 말이 뭉클하게 우리의 가슴으로 와 몸이 기울어질 정도로 입술을 댄다.       < 부처 / 김진경 > 치자꽃 향기가 좋ㅇ 코를 댔더니 그 큰 꽃송이가 툭 떨어지다 귀한 꽃 다친 게 미안해서 손바닥 모아 꽃송일 감추었더니 합장 인산 줄 알았던가? 보는 이마다 합장한 채 고개를 숙이고 간다 어허, 여기선 치자꽃이 부처일세!   ==> 성전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답니다. 달이 보고 싶다고 달을 끌어다가 동네 어귀에다 매달아두면 세상의 시들이 모두 죽습니다. 사랑이여 가까이 오지 말고 '조금 아득하게 '거기 계십시오. 치자꽃 향기에 취해 코를 들이민 이 시인은 벌을 받고 있습니다. 이웃들이 절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못하고 있다는 고백이랍니다. 벌이 혼내키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것이고요.     < 바다의 엉덩이   / 안도현 > 바다는 물속에서 제 몸을 바위틈으로 한사코 밀어 넣으려고 괴로워도 우겨 넣으려고 하네 그대 바위 속에서 바다는 길쭉해지기도 하고 연필심 처럼 뽀족해지기도 하네 모두 바닷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네 그것을 인간들은 까맣게 모르고 바다의 엉덩이가 펑퍼짐하다면서 해삼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고는 먼 수평선을 바라보네   ==> 누가 바다를 안다고 하는가. 저물녘 해변에 앉아 그리운 사람 손등을 매만지며 술을 마시면 바다가 몸 안으로 들어온다고? 초고추장 묻은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가 바람에 말리면 마른 국화꽃이 소스락거리며 지나간다고? 아서라. 자네 속내가 구절양장이듯 세상의 사물 또한 그 속내를 알수 없나니, 오늘도 바다는 원통하여 긴 머리를 풀어 우누나.   <새에 대하여 1  / 전원책 > 겨울 내도록 새들은 갈대숲을 떠나지 않는다 갈대들은 가을날 꽃을 잃을 때부터 청정한 아침의 경지에 든 것이다.   곧고 빈 줄기만으로 끝없는 그리움을 쳐죽이기엔 힘이 부치지만 도리 없이 잃은 것들로 매일 아침 새들은 가슴속에서 떠나게 할 순 없는 일이다   ==>시인은 눈이 밝아 갈대의 마음을 안다. 텅 비었지만 그 빈자리로 그리움을 '쳐죽이며' 새가 바라보는 하늘을 애틋하게 감싸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대숲을 지날 때 스석이는 소리가 나면 우리는 기도를 하여야 한다. 비어서 꽉 찬 사랑에게     < 아파트 사이로 수평선을 본다  / 이영진 > 네 등 뒤에 서서 너를 배웅하는 일은 언제나 눈물겨워 좋다. 이럴 땐 등까지 차오르는 내 이유없는 슬픔에도 온기가 베인다. 눈시울 가득 차오르는 눈물 너머로 너를 바라다보면 멀어지는 네 어깨의 수평선은 보폭을 따라 출렁이고 너는 멀어지는 만큼 내 안으로 같이 들어와 불을 켠다. 모퉁이를 돌아 네가 사라진 뒤에도 난 쉽사리 돌아서지 못하고 문득 눈을 하늘을 보면 아파트 사이마다 높게 걸려 빛나는 수많은 수평선들이 보인다.   ==>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눈빛들도 질량을 가지고 있어 각목같이 서 있는 아파트 사이에서 눈물의 바다를 이룬다. 수평선은 동해나 서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움과 이별이 서러운 돌자갈밭에 , 그리고 우리네 슬픔의 진원지 등뒤에 아득한  한을 이루어 빛나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세상이 주는 슬픔이나 가끔 만나는 일락에 눈이 멀어 볼 수 없을 뿐.   <옥루의 서 / 김관식 > 조그만 암캐 마아리가 있었다 토굴 속에는.   천장에서 떨어지는 푸른 빗방울   궁宮 상商 각角 치치 우羽   오음五音이 화해和諧하는 소리 끼니가 없어도 호올로 안여晏如함은 갈색 피부에 주름살이 새겨진 인도의 숲속 마하트마 간디가 원탁회의에 양을 몰고 나가듯 젖만을 먹고 살기 때문이지요.   벼슬아치가 수례를 머무르고 찾아온다 할지라도 두 다리 쭈욱 뻗고 마루에 걸터앉아 괼타리를 까 배꼽을 내놓은 채 이를 잡으며 말할 것이다.   옆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천장에 청룡 , 황룡이 뛰놀고 끼니가 간데 없건만 시인은 아직도 마하트마 간디를 생각하고 있다. '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이라며, 은행에 예치되어 있거나 거대한 주먹으로 , 치욕으로 개망신으로 천변만화한다. 그런데도 큰소리치는 시인이란 자들의 이 대책없는 순정들이여! 하늘의 별은 그래서 빛이 쩌렁쩌렁하다.     < 저는 시를 쓰지요  / 양애경 > 제 시를 읽었노라고 말씀하실 때 도망쳐 버리고 싶었어요 - 요즘 외로워하고 있군. 이라고 말하고 싶으셨던 게 아닌지요 저는 매꽃 덩굴처럼 무게는 없지만 살그마니 다른 사람 마음에 팔을 감고 매달리는 일 같은 것 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면서도 저는 시를 쓰지요 문뒤에서 벽 그늘로 스며 다니면서 사람들의 눈을 들여다보며 감정을 훔치기도 하고 눈을 내리깔아 그것을 숨기기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살며시 감고 올라가기도 하고 어느날 아침 방긋이 엷은 분홍빛으로 피어나기도 하고 시들어 지푸라기처럼 풀꽃대에 걸려 있기도 하죠 햇살에서 햇살사이로 지나갈 때 일시적으로 눈이 멀듯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기를 꿈꾸며 그러면서도 저는 시를 쓰지요 저 여기 있어요 여기 있어요 부르듯 가지가 흔들릴 때 알아차리지만 이미 그 자리엔 없는 바람처럼 시간과 시간의 틈으로 미끄러져 저는 가고 있어요 이승을 건너   그래서 저는 시를 쓰지요   ==> '솜털 보송한 덩굴이 옆 나뭇가지에 몸을 얹으면서, 얼마나 미안해할까'를 걱정하는 시인이여 너무, 외로워하지 마시게. 사는 일은 제몸의 무게를 서로에게 얹고 참아가는 것이라네. 둥둥 떠다니는 행성도 우주도 몸을 얹어놓은 것이고 천지만물도 지구라는 낯선 별에 몸을 두고 견뎌가는 것이라네. 자수정의 끝에서 명별하는 빛도 우리 눈에 몸을 얹어오는 것. 모시고 섬기세.     < 빨래 너는 여자  / 강은교 >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 한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그 여자는 위험스레 지붕 끝을 걷고 있다. 러닝셔츠를 탁탁 털며 허공에 쓰윽 문대기도 한다. 여기서 보니 허공과 그 여자는 무척 가까워 보인다. 그 여자의 일생이 달려와 거기 담요옆에 펄럭인다. 그 여자가 웃는다. 그 여자의 웃음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너 빨래통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삶에 스며든다. 어물거리는 바람. 어물거리는 구름들.   그 여자는 이제 아기 원피스를 넌다. 무용수처럼 발끝을 곧추 세워 서서 허공에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그 여자의 무용은 끝났다. 그 여자는 뛰어간다. 구름을 들고.     <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 정희성 > 발표 안 된 시 두편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느 ㄴ부자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발표도 안 한다 시 두 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만 시를 털어버리고 나면 거지가 될 게 뻔하니 잡지사에서 청탁이 와도 안 주고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나도 좀 잘 살고 싶으므로   ==> 현실생활의 궁핍을 피리 삼아 몸 전체로 흘러나오는 시 한편이야말로 시인들에겐 마른 가지를 뚫고 나오는 백목련의 꽃살 같은 것. 그렇기 때문에 쉽게 탕진하고 싶지 않다. 가슴에서 맴도는 핏기로 따뜻하게 덮었다가 이를 아는 이에게 전해주고 싶은것 . 이쯤의 세상사람들이여, 너무 나무라지 말기를....       < 유리창   / 김사인 >   사랑하기로 한다 5분이 지나면 마른풀과 짚으로 만든 잠자리에 돌아가 혼자 눕기로 한다 긴 침묵끝에 우리는 두개의 강이 되기로 한다 만나면 몸짓으로만 사랑하기로 돌아가 먼 곳에 하나씩 어린 물고기를 키우기로 한다     < 혼자 가는 먼집   / 허수경 >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 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량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때 당신 .....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금방 올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려 진설 음식도 없이 맨술 한 병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수 없는 , 무를 수도 없는 참 혹...그러나 킥킥 당신     < 묘지송  / 박인숙 > 세상의 수많은 무덤들아 모두 다 누구의 사랑들이니   내 가슴속에는 새끼를 치고 또 새끼를 쳐도 종내는 한 믿음에서 한 절망으로 번지는 무사마귀 무덤들도 가득한데   누구의 사랑이 이다지도 예쁜 봉분을 만들어 주었니   ==>  죽음 앞에서 등을 비비며 울던 울음도 세월이 흐른 뒤에는 동그람 봉분으로 열을 지어 고개 숙이고 있는데 거기서 이 당돌한 시인은 사랑을 찾아낸다. 그 봉분들의 주인공들이야말로 살아 있는 동안에 얼마나 아름답고 또 아프고 시린 사랑이었던가! 시간은 그 모든 사랑에게 동그란 봉분을 만들어 때로 풀들을 기르고 때론 풀무치도 기르면서 얌전하게 놀고 있나니. 사랑이여 그래 안녕하신가?   < 목숨을 걸고  / 이광웅>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 ......     < 동두천  / 김명인 >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 엄마를 닮아 얼굴만 희었던 그 아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하고 퇴학을 맞아 고아원을 뛰쳐나가더니 지금도 기억할까 그때 교내 웅변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일곱 살 때 원장의 성을 받아 비로소 이가든가 김가든가 박가면 어떻고 브라운이면 또 어떻고 그 말이 아직도 늦은 밤 내 귀갓길을 때린다 기교도 없이 새소리도 없이 가라고 내 시를 때린다 우리 모두 태어나 욕된 세상을   이 강변의 세상 헛된 강변만이 오로지 진실이고 너의 진실은 우리들이 매길 수도 없는 어느채점표밖에서 얼마만큼의 거짓으로나 매겨지는지 몸을 던져 세상 끝끝까지 웅크리고 가며 외롭기야 우리 모두 마찬가지고 그래서 더욱 괴로운 너의 모습 너의 말   그래 너의 아메리카로 갔어야 했다 국어로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 네 모습이 주눅 들 리 없는 합중국이고 우리들은 제 상처에도 아플 줄 모르는 단일 민족 이 피가름 억센 단군의 한 핏줄 바보같이 가시같이 어째서 너는 남아 우리들의 상처를 함부로 뱉느냐 더러운 그리움으로 배고픔 많다던 동두천 그런 둘레나 아직도 맴도느냐 혼혈아야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아이야     < 밤  / 나해철> 우리는 깨끗해져 있었당 가을과 드리워진 그늘 그리움에 대해서 레바논 혹은 캄보디아 그리고 어느 5월 서로 사랑하지 않는 죄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다 세상의 끝과 휴전선 아이들의 미래 만남과 삶에 깃든 신의 서정 쓸쓸한 한 여인을 위한 가슴 아픔 여러 장 단풍잎 같은 이야기로 밤이 깊었으므로 맑아져 있었다 우리는 찻집과 찻집 거리의 모퉁이 서늘한 바람 속에 서 있었고 한 친구는 아내를 위하여 소담한 빵을 사고 어머니를 위하여 누구는 깨끗한 과일을 담았다 그리고 바라본 하늘에는 별들이 정결히 빛나고 한 따뜻함이 살을 저미며 눈시울을 젖게 하는 것을 마주 보지 않아도 우리는 잘 알 수 있었다     < 자본주의  / 장대송> 17층 스튜디오 창에서   내려다보이는 마포 염리초등학교 개학식   단상 밑 울긋불긋 옹기종기 꽃대궐 차려입은 아이들   압축기로 눌려놓은 재활용 깡통 뭉치       < 철길  / 김정환 >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덩어리가 이만큼 견뎌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끓어 오름을 적셔주었다. 무너져 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온 것은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찾아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깔려진 버팀목으로 ,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까지 ,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건너면서 인천 방면으로 , 그리고 수원 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폼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날 후 어디메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때 어는 곳에서나 길이 이토록 머나먼 것은 그 이전의, 떠남이 그토록 절실했다는 뜻이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에 까지 다가와 어느새 철길은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 자욱이 된다.   < 인연  / 최영철> 오늘은 특별한 날이라고 자장면집 한 켠에서 짬뽕을 남녀 해물 건더기가 나오자  서로 건져주며 웃는다 옆에서 앵앵거리며 아이의 입에도 한 젓가락 넣어주었다 면을 훔쳐올리는 솜씨가 닮았다   ==> 밥상에서 서로의 젓가락이 엇가리는 순간 가족은 서로의 살을 비비는 것이다. 힘들지 않느냐고, 조금 참다 보면 좋은 날 있지 않겠냐고. 그 상에 오른 음식이 무엇인가는 아무 문제도 아니다. 따뜻한 말과 눈짓을 나누며 서로에게 말없이 몸을 빌려 주는 사랑. 그 사랑이라는 사글세방에 세 들어 살며 한세상 지내고 싶다. 가끔 귀도 후벼주고, 입다 팽개친 윗도리의 팔도 조심스레 퍼 옷걸이에 걸어주며.... '낡아도 좋은' 오매, 징글징글한 사랑이여.   < 관계  / 이정록 > 화장지 좀 바꿔주세요 . 똥꼬가 잘 쓰다듬어지지 않아요.   아침 일찍 여섯 살 난 아들 겨울이가 소리 지른다. 그렇지. 서로 쓰다듬을 때 온전한 사람이 되지. 입술이 밥 숟가락을 쓰다듬을 때며 혓바닥이 젓가락을 쓰다듬을  때, 쌀밥도 압력밥솥 뜨건 숨결이 오래 쓰다듬은 것이지. 현미 구분도미 칠분도미도 방앗간 미곡 탈피기가 알아서 잘 쓰다듬은 것이고, 이삭도 바람의 작은 올들이 가으내 쓰다듬은 것이지. 호랑이 어미가 제 새끼의 목덜미를 잘게 씹었다. 놓는 것도 쓰다듬는 것이고, 생일 케이크의 촛불을 끄는 것도 제 안 쓰러운 나이테를 쓰다듬는 것이지.   새로 생긴 할인 마트에서 똥꼬가 잘 쓰다듬어지지 않는 화장지를 사온 엄마의 마음도 사랑이지. 관계가 좀 복잡한 마음 씀씀이지. 왜냐하면 그곳엔 살뜰한 경제가 있거든 . 눈꺼풀이 눈망울을 쓰다듬듯. 때론 눈감아줄 줄 알아야만 다 큰 것이란다. 철 들었다고 한단다. 철이란 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처럼 올 것은 오고야 만나는 것을 믿는 것이지. 멀리서 다가오는 사랑, 벌써 곁에 와서 볼 비비는 사랑. 이미 떠나버린 사랑을 쓰다듬는 것이지. 가을이 여름을 소름 돋게 하고 봄바람이 고드름 끝을 어루만지듯 . 쓰다듬는 것이 세상를 키워가지. 죽은 지 천 년이 넘었는데도 우리를 쓰다듬고 있는 어른들은 모두 철을 쓰다듬고 아픔을 쓰다듬고 쓰다듬지 못할 것 까지 끝끝내 쓰다듬다 가신 분들이지.   나무로 다가가는 바람과 햇살과 빗물의 종교, 푸른잎으로 외는 주문이지. 쓰다듬는다는 것은 세상 모든 관계의 살가운 소리이자. 힘이란 녀석이 깨어 나오는 동우리지. 동우리 속 어미새가 굴리는 작은 알들, 그 껍질 위에 나 있는 발톱 자국이지. 앙가슴 털로만 문지를 수 있는 따뜻한 희망이지 .   ==> '닦는다' 라는 동사와 '쓰다듬는다' 라는 동사 사잉에 우리들의 각박한 초상이 있다. 아내의 가난한 살림살이가 있는가 하면 세상을 살면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적대시하고 싸우는 우리네 살림살이가 있다. 마른 가지를 쓰다듬는  바람으로 개나리가 피고 돌 틈에선 진달래가 핀다. 그래서 떨어지는 벚꽃들도  아스팔트를 쓰다듬으러 내려오는 것이다.     < 술에 취한 가오리가 내게 말하기를 / 김수열 > 걸음걸이부터가 시인다운 기철이형하고 백파 홍성유의 별미 기행 광고가 걸려 있는 서문시장 영미식당에서 가오리회 한 접시 가운데 놓고 한라산 소주를 술술 비우다가 기철이형 하는 말   나언제부턴가술먹엉집이가면 달력에동그라미표시허맨게 도대체얼마나먹어졈신고혼번보젠 지금까지보난대강일주일에혼사나흘은먹엄대 그정도민괜찮은거아니라   술이 사람을 먹지 않고 사람이 술을 먹는 기철이형은 먼저가고 어머니 말씀을 빌면 복쟁이 똥물 먹듯 먹어대는 배설 길고 위장 큰 복쟁이들 몇 명만 남아 항상 사람 가득한 노찻사 그 언강 좋은 주인 마담에게 괜한 신경질에 투정도 부려보다가 사람들은 이미 잠이 든 시간 비틀거리는 복쟁이들만 휘청대는 거리로 나오고 손님 다 왔수다 하는 택시 기사 목소리에 잠에서 깨 어리둥절 둘러보면 언제나 그랬듯이 나 혼자다   비틀거리는 별들 사이를 휘청거리며 별들 가까이 허공에 매달려 비틀거리는 집을 쳐다보다가 술기운에   나도혼번기철이형같이 달력에표시해보카   하고 생각하는 찰나 긴 배설이 뒤틀리면서 무언가 뜨겁고 묵직한 것이 역류하면서 급기야는 우왁하고 아가리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술독에 빠진 가오리가 한꺼번에 헤엄쳐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오면서 그 가오리 술에취해 하는 말   야야웃기지마라개가똥을참지 달력에표시허민좀낫나 먹던입이어디가나 지랄말앙먹어질때처먹으라 먹당죽은귀신은때깔이라도곱나   ===> 술을 끊겠다든가. 절제하겠다는 다짐과 약속은 지구위에 세워졌던 대표적인 헛맹세에 속하지 않을까? 그 맹세들만 모아도 태평양이 넘실댈 것이다. 달력에 표시하고 정초에 좌우명 대신 걸어도 도무지 지켜지지 않으니..... 그런시의 화자에게 가오리께서 한 말씀 하신다. "지랄말앙먹어질때쳐먹으라!"하이코!술안중니가오리한테도 이런 지청구를 들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