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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미 / 이선영>
책상 앞에 앉아 있거나 벽에 매달린 거미 한 마리가 보인다
거미가 제 집을 짓는다고 줄을 쳐놓은 것인지
제가 쳐놓은 줄에 제가 걸려든 것인지
거미의 몸은 거미줄 안에서 사지를 늘어뜨린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죽은 것일까 그렇다면
거미줄은 걷어내야 할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 채 생각을 마치기도 전인 다음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먹잇감에
재빨리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거미의 저 놀라운 움직임!
그 번뜩이는 삶의 순간을 위해 거미는 길고 무료한 죽음을 견뎌내는 것이리라
책상 위의 컴퓨터 앞에 즐겨 앉아 있는 나도
삶을 위해 먼저 죽음의 포즈를 취하는 거미를 닮아간다
컴퓨터와 내가 거미줄로 한덩어리가 되어 있고
거울을 보면 나는 기계의 점멸하는 야망과 함께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한마리 외로운 거미다
< 청설모 / 이선영>
나뭇가지를 타고 다니며 나무의 수액을 햝는
청설모의 하는 양을 보며 문득 생각한다
시란 저 나무와 같은 것이겟거니,
어미 청설모와 그 새끼들의 입을 적셔주고 목을 축여주는
수액을 분비해내는 일 !
한 마리 허기진 백로를 위해 때로는 먹잇감을 되어주는
빙어처럼 살고 싶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시를 쓰기도 전에 몸을 먼저 써버리는 일,
그건 바라는 바가 아니라 하더라도
나는 다시 생각한다
내 시가 나무의 수액이 될 수 있는가를
정갈한 수액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가를
청설모야, 내 시의 맛이 어떠하냐 네가 먹을 만하냐
어째 나는 식물성으로 회귀할 수 없는 육식성에 길든
위험한 동물, 내 시는 네겐 해로운 분비물인 것만 같구나!
< 도망가는 연인 / 이선영>
- 왜 그를 사랑하지?
- 바람처럼 살고 싶어서요 *
아름다움은 결핍이지
연초록 대나무숲을 둘러봐
새벽이슬이 채 베갯잇 연정戀情을 걷어가지 않은
아름답지만 눈도 없고 귀도 들리지 않아
게다가 우리를 들어올려줄 두 개의 팔 따위란 원시의 몸 에서나 돋아난 것일 테니
그 동정 없는 장대나무숲을 우리는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리고 있지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알아채버린 두 팔과 팔의 질기고 질긴 얽힘이니까
구부러진 골목길로 우리를 연거푸 몰아넣는 생활과 우리의 몸을 늘 거기 문설주로 세워두는 의무에,
서로를 못 알아보게 될 때까지 늙어가고야 말 육체에,
우리는 지금 쫒기고 있는 중이지
대나무숲은 우리를 잠시 그 무관심 속에 풀어놓지만
언제 우리의 길을 가로막는 흉기가 되어 날아올지 몰라
아름다움은 적이 취하면 금방 무기로 변하는 야속함이거든
내가 그를 도망중인 이유는
몸을 넘어뜨리며 바람처럼 내달리려는 그의 의지 때문이지
그가 나를 떨구어내지 않는 이유
나만이 그 바람을 읽어내는 야생화이기 때문이야
< 희망 / 이선영>
이른 아침 불 미처 켜지 않은 어두운 방
반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에
책상 위 놓여 있던 흰 종이 한장만 환하다
그 종이에 씌어진 검은 글씨들이 눈에와 박힐 듯하다
- 사회는 나를 포기해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는 이것이 무엇인지 분명 아는데
살고 싶다, 난 산다*
눈이 아프다
눈길이 묶인다
종이 한 장만한
딱 고만큼만 어둠을 훼손하는 햇살,
여우벌 같은 희망
*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박승일의 글에서 발췌.
< 우문우답 / 이선영>
나의시
내 손으로 쓴 시가
이 세상에서 단지 나만이 쓸 수 있는 시라는 건
이상하다 그보다도
내 손으로 쓴 나의시가
어디서인가 읽어본 듯한 다른 누군가의 시일 수도 있다는 건
더 이상하다 그렇다면 진정
나의 시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머리로만 가슴으로만도 쓰고 싶지 않고
노래인 것만도 울음인 것만도 아니어야 할 나의 시
그걸 찾으러
어제도 오늘도,
가다가 서다가,
가는 둥 마는 둥,
내 다리 한짝, 내 다리 한짝 전설의 고향처럼
나의 시 어딨어, 나의 시 내놔
나의 시, 나의 시 얼빠진 듯 헛소리
< 낡아도 좋은 것이 사랑뿐*이랴 / 이선영.
초록은 낡은 서정** 이라고 미래파 어느 시인은 말했던가
아마도
초록의 시대는 가고
새로운 트랜드는 빨강,
'친절한 금자씨'의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말하는 붉은 립스틱과
숙부인 정씨가 조원의 면전에서 아연 떨어뜨린 빨강 목도리는 당대를 풍미한 '스캔들' 아니던가
터키의 노벨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일찍이 호명했듯
그 이름은 빨강, 붉은 서정이다
붉은 피, 낭자한 선혈
핏빛 잔인 흉측 끔찍 공포
괴기영화와 잔혹동화와 엽기사건이 횡행하고
피를 보고 피를 묻혀야 처절한 진실이 되며
초록은 전설이고 초록은 풍문일 뿐이지만,
초록은 추억처럼 낡았지만,
그러나
초록은 낡아서 더욱 빛나고
(르네 마그리뜨의 그림 [자연의아름다움]은 온통 초록 빛이지 않던가!)
빛나는 초록은 그리운 자연의 빛깔이다
청도(淸道)의 무르익은 보리밭을 보라
그 초록의 무성한 힘이
붉은 물감의 삽시로 번짐을 거둬들이는
21세기 판도라의 상자가 될 수 있기를
* 김수영 [나의 가족]에서
* *장석원 시집 [아나키스트] 중 [근원적 센티멘탈 ]에서
< 벚꽃잎처럼 / 이선영>
봄 벚꽃 아래서
비슷한 머리 모양에 비슷한 옷가지를 걸치고 오종종한 가방을 든 노인네들이
관광버스라도 기다리는지 옹송옹송 모여 서 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가끔씩 다른 이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구겨진 옷깃을 등 두에서 펴주기도 하며
몇십년 젊었던 시절의 넘치던 욕심과 미움과 마음과 노여움이
이제는 다같이 늙어버린 육신 끼리끼리의 어울림 속에서
벚꽃잎처럼 가법게 흩날려가는가보다
보름 가까이 죽은 듯 누워 사경을 헤맨 시아버님,
깨어난 뒤 얼굴 보고
그냥 우신다
마음 굳게 먹으세요, 한마디가
무슨 소용이 되랴
그냥 놀란거다
그냥 서러운 거다
그냥 겁나는 거다
노인네들은 몇자 갖춘 말보다 제대로 표현할 줄 안다
한 소절 울음 앞에
벚꽃잎처럼 후르르
말이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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