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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어느 철학자는 덧없고 유한한 인간의 삶에서 반복적 일상이 오히려 행복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계기가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작은 고향 마을에 살면서 평생 그곳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칸트는 정확하게 오후 네시만 되면 하루도 빠짐없이 같을 길을 산책했기에 마을 주민은 그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시침을 네 시로 맞췄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어찌 보면 루브르는 내 삶의 오후 네 시를 가리키는 행복한 시계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P 10
롤랑 바르트가 말했듯이 망자의 생전모습을 담은 초상은 어찌 보면 미리 작성해둔 사망확인서이자, 일종의 사자약전이다. 초상화의 인물이 역사의 두꺼운 지층에 묻혀 있을수록 감상자의 호기심은 증폭된다. 그래서 그 인물의 모습과 특징에 더욱 주목하게 되고, 심지어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의 성격을 가늠해보기도 한다. 이처럼, 초상화는 감상자에게 색다른 만남의 계기이자, 시공을 넘어 신비스러운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기도 하다.
43 X 30 센티미터 크기의 그림에 들어 있는 공주의 몸은 4분의 1 정도 옆으로 돌아갔지만 얼굴은 완전 측면으로 그려졌다. 이런 구성은 이 작품이 르네상스의 표현기법이 아직 무르익지 않은 시점에서 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 개인 초상화의 입체적 표현이 아직 미숙한 편이어서 같은 시기 플랑드르 화가였던 반 에이크의 뛰어난 입체적 사실 묘사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이런 특성은 로마 문명의 전통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고대 로마시대 동전에 등장하는 인물의 얼굴은 항상 완전 측면으로 새겨졌다. P 27
그 영향을 받은 프란체스카도 이전에 물감을 섞을 때 사용하던 달걀 흰자 대신 기름을 쓰게 되었다. 기름의 투명한 표면은 밑바탕의 색이 자연스럽게 겹쳐 나오게 하고, 질감의 섬세한 변화를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무판에 그린 이그림을 분석한 결과, 우채와 템페라기법을 함께 사용했음이 밝혀졌다. 새로운 유채 기법이 소개되어 기술혁신의 덕을 보게 된 전환기 프란체스카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P 35
다빈치는 인물의 구도를 피라미드 형태로 설정함으로써 더욱 완벽을 추구했다. 배경에 풍경을 두고 , 정면을 4분의 3각도로 바라보는 인물이 등장하는 토스카나식 초상화 전통을 따랐지만, 인물을 화폭 가득 채워 넣는 기법은 다빈치의 혁신적인 시도였다. 인물을 안정적으로배치하는 삼각형 구도는 다시 손, 앞가슴, 얼굴로 나뉜다. 어두운 배경에서 밝게 두드러져 나온 이 세부분은 피라미드 구도를 따라 밑에서부터 위로 향하는 움직임을 형성한다. 영혼이 위로 승화한다는 느낌마져 들게 하는 구도다. P 45
몸은 4분의 3 방향인데, 고개를 조금 더 돌린 그녀의 얼굴이 향한 방향은 정면에 가깝다. 얼굴을 반으로 갈라서 양쪽을 번갈아 가려보면, 오른쪽 반쪽은 45도 정도 각도로 앞을 향하고 있고, 왼쪽은 거의 정면을 향한다. 감상자가 오른쪽 눈을 감고 왼쪽 눈으로만 바라보았을때, 모나리자 얼굴은 좌우의 비율이 비슷해져 거의 정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다빈치는 왜 모나리자의 얼굴을 분할에서 각기 다른 각도로 재구성했을까? 입체 공간에 있는 사물을 평면에 고스란히 표현할 방법을 찾으려 애썼기 때문이다. 앞에 어떤 사물이 놓여 있을 때 , 사진기의 렌즈는 하나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사람은 기계와 달리 , 좌우눈으로 평면이 아닌 입체를 분석적으로 포착할수 있는 정교함을 지녔다. 다빈치는 인간의 여러 감각 중에서 시각을 으뜸으로 여겼고, 인간의 눈이 지닌 구조와 허점을 평생 연구했다. 그의 멈추지 않는 호기심과 오랜 연구가 결실을 보아 가던 시점에 그린 모나리자에는 '평면 위의 입체적 표현' 이라는 천재적 발생과 시도가 들어있다. P 47
우리의 유교적 전통사회에서 시화악무(詩畵樂舞)의 멋을 아는 계층은 사대부 여인들이 아니라 기생들이었던 것처럼, 베네치아에서도 여성 지식층은 상류화류계 여자들이었다. P 57
나니는 차림새에서부터 생김새에 이르기까지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골고루 갖췄다. 당시에 미의 첫번째 기준으로 꼽았던 투명하고 흰 피부, 그녀의 얼굴과 앞가슴은 우윳빛 뽀얀 살결로 빛을 발한다. 베네치아 여인들은 그녀와 같은 피부를 가지기 위해 솜털을 말끔히 밀어내고, 여러 시간 우유에 담가두었던 송아지 살점을 밤마다 몸에 붙이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뿐 아니라 머리 색도 아주 중요했다. 베네치아의 여성들은 '베네치아 금발'이 되기 위해 독특한 정성을 들였다. 우선, 뚜껑 없이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젖은 머리새가 모자 바깥으로 빠져나오게 하고는 저택의 발코니로 나간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향료, 오렌지 껍질, 달걀 껍데기, 재 등을 섞은 물로 계속 적셔가며 한낮의 베네치아 햇빛 아래 노출한다. 그러면 마침내 붉은 빛이 감도는 탐스러운 금발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잘록한 허리를 만들려면 또 다른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고래뼈로 만든 코르셋을 바짝 조여 입는 것이다. 그러면 젓가슴은 더욱 부풀어 오르고 둔부는 풍만하게 두드려져 생산력 있는 건강한 여성으로 돋보였다. p 60
렘브란트는 그 실마리가 결국 자신임을 깨달았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기에 평생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인간의 정체를 찾으러 했을 것이다. 당장 불을 피우고 끼니를 이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돈이 되지 않는 늙은 자신의 자화상을 끊임없이 그렸던 렘브란트, 그가 그릴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강한 정신력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작업대 앞의 자화상을 보면 위대한 예술의 신전에 스스로 자신을 바친 현자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든다. P 74
고야는 1792년 말 심한 병에 걸려 그 이듬해 귀머거리가 되고 말았다. 친구 마르타네즈의 초대를 받아 남부 항구도시인 카디스에 갔던 고야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며 균형감각을 잃었고 청각에 문제가 생겼다. 두 달 동안 꼼작없이 침대에 누워있던 그는 혹시 자신이 미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에 휩싸이기도 했다. 병의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 당시에 흔했던 매독이거나 , 납 성분이 강한 물감의 부주의한 사용에 따른 정신분열증이었던것으로 추측된다. 청각을 잃고 외부와의 접촉이 끊어진 그에게 그런 상태는 한편으로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시각도 청각의 상실로 인해 더 예민해진 듯했다. 그와 더불어 그의 작품도 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진 상상과 환상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날카로워지고 비판적으로 바뀌었다. P95
미치광이들은 왜 배에 타고 있을까? 중세시대에는 미치광이를 포함한 사회 부적격자들을 배에 실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곳으로 추방하곤 했다. 또한, 물은 단단한 뭍과는 달리 언제 변할지 모르며 통제할 수도 없는 까닭에 비이성적인 상태를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물 위에 떠 있는 사람들은 정결한 영혼이라기보다는 악마적 본능에 사로잡힌 미치광이로 그려졌다. 그런가 하면, 혼자힘으로 건너기 어려운 물을 건너게 해주는 교회나 운명공동체를 상징한다. 신의 나라로 건너가야 할 때가 여기서는 탐욕과 욕정에 사로잡힌 인간들로 가득하다. 따라서 돛대에는 돛이 없고, 키에는 썩은 나뭇가지가 묶여있고, 노를 저어야 할 뱃사공도 큰국자를 쥔채 탐식에 빠져 있다. 이 배는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정작 배안의 무리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끝없는 욕망과 갈증의 노예가 되었다. P 108
뒤가 켕기는 일을 벌일때에는 본능적으로 먼저 주위를 살피게 마련이다. 이때 사기도박꾼의 시선은 나머지 인물과는 달리 화면을 벗어나 바깥쪽을 향한다. 마치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감상자를 의식한 듯한 모습이다.
그의 이런 시선은 감상자를 자연스럽게 그림안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낸다. 도박꾼의 속임수를 보고도 못 본 척해야하는 감상자는 그와 한패가 되어 사기도박에 말려든다. P 121
****의상의 기호학
카드놀이판 가운데 앉은 여자는 앞가슴을 아슬아슬하게 드러내고 있다. 젖무덤이 삐져나올 만큼 몸에 끼는 옷을 입었다. 수많은 구슬로 두 손목과 목과 귀와 머리를 화려하게 치장했다. 진주는 바다에서 태어난 비너스의 장식물이다. 서양회화에서는 몸파는 여자를 묘사할 때 흔히 진주 목걸이나 팔찌를 걸치게 한다. 더욱이 진주알이 굵거나 많을 때는 뚜렷하게 매춘부임을 의미한다. 삼각뿔 모양의 모자에는 깃털이 꽂혔다. 이것 역시 몸 파는 여자의 표식이다. 천을 여러 갈래로 벌어지게 만든 소매는 그 틈새는 안감이 보이게 하여 화려함을 더해준다. 술을 나르는 여자도 보석 팔찌를 찼지만, 그외에는 아무 장식도 없다. 머리에는 윤기나는 황옥색 터번을 둘렀고 매춘부와 마찬가지로 깃털을 꽂았다. 저고리는 연보라색 수를 놓은 무늬로 군데군데 맛을 냈다. P 124
눈앞에서 사랑하는 이를 잃는 아픔, 어린것을 남겨두고 숨을 거두어야 하는 비통함. 가족을 모두 잃어버린 절망, 노예로 끌려가는 부인을 막지 못하는 원통함. 삶의 터전을 한순간에 빼앗긴 억울함, 적의 손에 운명을 맡겨야 하는 기구함. ...이 모두가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불행이다. 그럼에도, 바다 한 방울 변하지 않고 하늘 한 점 달라지지 않는다. 벌써 저녁이 되어 세상은 온통 황혼빛으로 물들었고, 이제 잠시 후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방은 어둠으로 덮일 것이다. 키오스 섬의 학살앞에서 서 있으면 인간의 극한 상황과 자연의 장엄함이 어우러진 한 편의 웅장한 서사시를 그림으로 보는 듯한 감동이 감상자의 가슴에 묵중하게 내려 앉는다. P 152
사하라도 겨우 10퍼센트가 모래사막일뿐 이다. '푸른인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투이레그족의 거주지인 사하라의 가장 깊숙한 지역 호가르에서도 풍화 작용으로 깎인 절묘한 바위들이 장관을 이룬다. 지금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불덩이 대지의 놀라운 풍경이 16세기 그림에 믿기지 않을 만큼 닮은 꼴로 담겨져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P 105
풍경이 인간 시야의 최대각인 120도를 넘어서기에 실제보다 더 넓게 느껴진다. 감상자는 마치 높은 바위에 올라서 발아래 펼쳐지는 경치를 바라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P 213
어쩌면, 끝낼 수 없는 무한의 거대함 앞에서 멈춰버렸기에 터너의 작품들은 추상 덩어리로 남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무한의 세계로 들어가는 구나."라고 임종의 말을 남겼던 터너의 그림 세계는 어차피 명확한 끝이 없어 보인다. P 236
훤히 들여다보이는 천으로 치부를 애써 감추려는 태도 자체가 모순이다. 바로 이점이 크라나흐의 유쾌한 상상력이며, 성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장치이다. 풍경속의 비너스는 가리면 가릴수록 더 보고 싶어하는 감상자의 본능을 자극한다. 왼손새끼손가락 끝을 봐도 그렇다. 곧게 뻗은 새끼손가락은 가려야 할 부분을 오히려 명시적으로 가리키면서 감상자의 시선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속이 훤히 비치는 투명한 천, 그리고 교태라도 부리듯 그 천을 손에 쥔 채 은근히 치부를 가르키는 손가락, 모순을 통해 관능을 강조하는 멋진 방법이다. P258
*** 신화로 포장한 에로티시즘
물론, 성적욕망이 위기나 종말적 상황에서만 특별히 발현하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다른 요소와 상호작용하며 발현하는 정도의 차이를 보일 뿐이다. 굳이 정신분석학이나 사회심리학을 들먹이지 않아도, 개인이든 사회든 이성과 도덕이 강하게 지배하는 시기에는 성적본능이 의식의 통제를 받아 억눌린 상태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졌다. 그러나 억눌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틈만 나면 금기를 돌파하거나 우회해서 스스로 욕망을 충족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P 269
엔디미온에게 매혹된 달의 여신으로 아르테미스를 지목한다. 그녀는 사냥의 여신이며 여성의 순결을 상징한다. 달빛의 여신을 셀레네 대신 아르테미스로 가정한다면 여성 심리의 흥미로운 구조가 드러난다. 순결성에 대한 집착 때문에 아르테미스는 결벽증에라도 걸린듯 남성을 멀리한다. 목욕하는 자신의 몸을 우연히 보았던 사냥꾼 악테온Actaeon 은 그녀에게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그런 아르테미스가 밤마다 엔디미온을 찾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해답은 엔디미온의 상태에 있다. 남성이 의식을 잃었을때 아르테미스는 사랑을 나누러 다가온다. 생애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을 때에만 남성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할 수 있는 아르테미스의 의식은 깊고 복잡한 여성 심리의 퇴화한 꼬리뼈인 셈이다. 이처럼, 신화는 인간의 본능과 감정을 걸러내는 아주 오래된 그물이다. P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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