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무치는 사람 / 조용미 >

 

사람이 그리우면 뼈에 사무친다는 말, 이젠 알 것 같다. 불꺼진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장대비 쏟아지는 소리, 뼈마디 마디에 스며들어 서 있을 수가 없다. 한 팔 뻗어 닿을 거리쯤 , 그가 있었음 한다. 서둘러 돌아가지 않아도 좋을 곳에서 마주보았으면 한다.

 

비 내리는 새벽이면 뼈에 사무친 사람 있어

플라타너스 비 맞고 누워있다.

 

 

< 누가 왔나요  / 조용미 >

누구세요, 누가 왔나요

- 아니요, 문 밖엔 아무도 없어요

들어오라고 하세요, 어서요

- 누군가 등 떠밀어 저만치 뛰어가는 걸요

 

떠밀려 가는건 마른 나뭇잎들이 아니다. 저마다 숨가쁜 소리를 질러대며 뛰어다니고 있지않은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뛰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제 풀에 지쳐 쓰려지는 날이면 아무도 모르게 잊혀진다. 내게서 아니 우리 모두에게서.

 

누구세요, 누가 왔나요

-저기 벌거벗은 은행나무가 손을 내미는데요

주세요, 뭐든 갖고 싶다는 것을 주세요

-어쪄죠. 떨어진 나뭇잎을 달라는데

 

 

< 핏줄  / 조용미 >

당신과는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오랜 세월 뼈마디에 쌓아온 앙금

잔털을 부여쥐고 서 있어야 했던 것은

내 어머니의 죽지 못할 가슴 때문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문 밖에 서서

입술을 깨물어야 했던 건

새파란 가을하늘 그 휘청이던 햇빛,

햇빛 때문이었습니다

 

내 몸에 흐르는 절반의 피와

단단한 뼈를 버리는 날,

그 날이야말로 당당한 시작이라 믿었던 시절

 

" 내 땅에 몸을 비비며 자란 것아

멍을 풀어라, 깨끗이 모두 풀어라

저녁놀이 지는 때를 알아야지"

 

어디서부터 어긋난 바램이었습니까

당신의 커져버린 눈 앞에

어쩔 수 없이 겉돌고 있는

어머니, 당신의 땅은 메마르지 않습니까

 

일천구백구십사년구월십사일

철창에가로막힌

스물넷의오늘같은내일.

 

 

 

 

< 장대비 / 조용미 >

 

네 얼굴을 옆에서 보던 날

밤새 배앓이 해야했다

한풀꺾인 햇살이

무너질 수 없어 당당해져야함은

제 살 깎아 내리는 일이다

말하지 못할 꽃 한 송이 묻어두고

살아서 너를 만날 수 없다면야

죽어서도 마찬가지리라

 

도심 한복판 장대비 쏟아지는 날

성대에 고인 빗물을 뱉아낼까

 

 

< 가랑비 / 조용미 >

한 번쯤 생각해 보십시오. 발목 잡혀 뛰지못하는 토끼와 사냥꾼의 엽총에 날개를 잃은 천둥오리, 저수지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붕어, 피라미들과 여기, 높은 빌딩 숲에 살아가는 우리들을 말입니다. 에어컨 바람에 숨이 막히고, 천원짜리 생수 한 병에 하루의 수분을 공급받는 우리에겐 자유가 없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 수도, 세상을 향해 뛰어갈 수도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알고 있습니까?

 

가랑비 사이사이에 빈 공간이 있죠! 그 속에 무엇이 있는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 가을에는 꿈꾸지 말라  / 조용미 >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울대가 아파서 몇 날을 앓아 눕는다. 후드득 떨어지던 플라타너스 잎을 밟고 술 취한 주정뱅이가 꿈꾸는 하루, 겨울이 당도할 때 쯤 사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밤마다 미친듯이 달려가는 여자를 붙들고 부들부들 떨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지나가는 사라믈이 손가락질하고 돌을 던지면 날마다 오늘만 살자고 다짐했다. 언젠가는 그 끝을 보게 될 것이므로 바다괴 되는 날, 그때는 돌아 갈 수 있으리라.

한 차례 몸살을 앓고 나면 씻은 듯이 나을 것이다. 그러니 가을에는 꿈꾸지 못하게 하라.

 

 

 

< 의정부 시장

  - 겨울앓이 5  / 조용미 >

 

며칠이 지난 또 하루,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시간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발길질하며, 시장 바닥을 차고 있는 겨울밤 선술집 주인 아줌마의 늘어진 뱃살을 본다. 시장바닥에 나뒹구는 잡다한 쓰레기며 겹겹이 묶인 종량제 쓰레기봉투, 그드이 살아야 할 땅은 어디쯤인가. 묻힐 곳을 잃은 검은 비닐봉지가 겨울바람에 밀린다. 끝도 없이 밀린다.

 

기다리는 것은 없다

채워지지 않는 소주잔

차다. 달빛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