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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입이 없는 것들』이후 십 년 만에, 이성복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래여애반다라』가 출간되었다. 언뜻 불교 용어 같기도 한 이 낯선 제목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는 신라 시대 향가 「풍요, 공덕가」의 한 구절로, 이 여섯 글자 이두는 '오다, 서럽더라'로 풀이된다. 신라 백성들이 불상을 빚기 위해 쉼 없이 흙을 나르면서, 그 공덕으로 세상살이의 고됨과 서러움을 위안하고자 불렀던 노래가, 이번 시집의 들머리에 놓인 "뜻 없고 서러운 길 위의 윷말처럼, 비린내 하나 업ㅄ던 물결"의 맑은 '죽지랑의 못'과 맨 끄트머리에 놓인 "어렵고 막막하던 시절" 바라봄만으로 큰 위안이 되었던 한 그루 '기파랑의 나무'를 각각 입구와 출구로 삼은 "이성복의 풍경"(문학평론가 김현)을 바라보고 드러내는 데 긴요한 열쇠 구실을 한다. 오랫동안 학생들과 함께했던 대학을 뒤로하고, 지난해 이순(耳順)을 맞은 시인은 모두 여든두 편의 시를 여섯 개의 장에 나눠 실은 시집 『래여애반다라』에 자신의 육십 해 인생과 지금껏 발표한 여섯 권 시집의 자취를 고루 담아내려 했다. "이곳에 와서(來), 같아지려 하다가(如), 슬픔을 보고(哀), 맞서 대들다가(反), 많은 일을 겪고(多), 비단처럼 펼쳐지고야 마는 것(羅)"이 바로 우리들 삶임을,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온 누구나 예외 없이 생-사-성-식의 기록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하여 우리는 절망과 서러움으로 점철된 생의 '불가능성'을 거듭 되씹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있노라 말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시종 담담하고 또 허허롭다.   -  Yes 24  제공 참조 -       < 구름  / 이성복 >   나는 아버지 구름을 아버지라 하고 아들 구름을 아들이라 한다 내가 아들을 껴안고 입맞추려 하면 비안개 몇 점 옷에 맺힌다 너무 세게 껴안지는 말라시던 아버지 말씀, 어지간히 껴안아선 젖지도 않던 아버지, 아버지 구름의 구름 말씀     < 식탁 / 이성복>   아이들이 한바탕 먹고 떠난 식탁 위에는 찢긴 햄버거 봉지와 우그러진 콜라 페트병과 입 닦고 던져놓은 종이 냅킨들이 있다 그것들은 서로를 모르고 가까이 혹은 조금 멀리 있다   아이들아, 별자리 성성하고 꿈자리 숭숭한 이 세상에서 우리도 그렇게 있다 하지만 우리를 받아들인 세상에서 언젠가 소리 없이 치워질 줄을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  이별 없는 세대 1 / 이성복>   나뭇잎은 푸른 하늘에 떠 있습니다 검은 가지는 죽은 듯이 세워져 있고요 젖가슴이 큰 여자 하나 서쪽으로 떠내려가지만 없는 눈으로는 불러 세우지도, 마냥 보내지도 못합니다 혼자 몇 시간을 앉아 있는 날은 내 나라의 땅은 이리 미끄러울까요 생각만으로 일어서면 기어코 넘어질테지요 보세요, 지금 서 있는 나무 바로 곁으로 다른 나무가 다가가는군요 얕으게 움직이는 구름 조각을 따라 어느 각도로는 겹치는 실수는 없네요 아 보세요. 이제는 두 나무 위 하늘이 엎어져 푸른 비 쏟아지는군요       < 이별없는 세대 2 / 이성복>   당신의 눈자위에 어른거리다가 잔잔한 나무가 되렵니다 바람 부는 들판은 내 앞에 있고 안개 속에서 늙은 여자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제붵 나의 몸체는 흔들립니까? 나라의 가난한 변두리를 떠나지 않고 흔들립니까? 어둠을 확인할 만큼 애매한 빛 속에서 당신의 눈자위에 어른거리다가 잔잔한 나무가 되렵니다 순순한 굴절과 不動이 나의 꿈이지만 잠자던 痛覺들은 깨어났습니다 내가 신음하면 당신은 나를 잊어버릴테지요 큰 소리로 당신이 나를 부르기 전에는, 그러나 입안에 溫氣가 남지 않아요       < 그림에서 1  / 이성복>   푸른 정강이로 머리를 감싼 여인은 굵은 넓적다리로 종아리로 가려도 추워, 자꾸 추워서 마른 수세미처럼 여윈 팔을 발목 아래로 늘어뜨린다 닿지 않는 허방 어딘가에 손을 뻗어, 아직 식지 않은 온기를 더듬는 듯이.     < 그림에서 2 / 이성복>   여인의 얼굴은 막 자라나는 새싹을 감싸고 있다   그러니까 눈은 연둣빛 두 장의 떡잎이고 코는 아직 상처받지 않은 여린 줄기, 또 입은 양분을 다 뺏기고 쭈그러진 씨앗   어제도 많이 힘들었겠지만 내일 걱정을 다 쓸어 담을 만큼 두개골의 용적은 충분하다   혹시라도 흐르는 눈물이 덜 덥혀질까 봐 따뜻한 곰보빵, 따뜻한 소똥 같은 머리 타래 뒤짱구 위에 얹어주고 가만히 물어본다   " 넌 열이 날 때 밤이 좋니, 낮이 좋니?"   그러면 가스라이터에 그을린 눈썹없는 눈으로 싫은 표정을 하는, 가루투성이 나방의 번데기 같은 여인       < 선생  3 / 이성복>   브래져만 걸친 젊은 부인이 누워 턱받침을 하고, 고혹적인 눈으로 빤히 쳐다보면서 속삭였다 "...... 천재적인 분 ! " 아, 한심하다, 한신한 놈! 아침에 시나 뭐 그런 거 좀 써보려고 노트 펴고 침 흘리다 너무 황홀해 깬 꿈, 내 수준, 적성 , 취향 등에 딱 알맞는 꿈       < 시에 대한 각서  / 이성복 >   고독은 명절 다음 날의 적요한 햇빛, 부서진 연탄재와 식은 탱자나무 가시, 고독은 녹슬어 헛도는 나사못, 거미줄에 남은 나방의 날개 , 아파트 담장아래 천천히 바람 빠지는 테니스 공, 고독은 깊이와 넓이, 크기와 무게가 없지만 크기와 무게, 깊이와 넓이 지닌 것들 바로 곁에 있다 종이 위에 한 손을 올려놓고 연릴로 그리면 남는 공간, 손은 팔과 이어져 있기에, 그림은 닫히지 않는다 고독이 흘러드는 것도 그런 곳이다       <  노래에 대한 각서  / 이성복 > 기억의 남쪽 바다 십자성과 야자수는 노래 속에 있다 진한 박하향과 망고향 흐르는 노래 하얀 조개껍질같은 섬들 공벌레처럼 미끄러지는 통나무배들 그 뒤로, 수시로 끓는 납덩이 같은 노래의 추억은 해저 화산처럼 폭발한다 진흙을 싸 발라 구운 원숭이 두개골처럼 이번 생의 붉은 털이 다 빠지고도 남을 노래, 그러나 노래가 알지 못하는 이번 생의 기억은 시퍼런 강물이 물어뜯는 북녘 다리처럼 발이 시리다     <  눈에 대한 각서  / 이성복 >   자벌레가 파먹은 어떤 눈은 옹이 같다 눈물은 빗물처럼 밖에서 흘러든다 기어코 울려면 못 울 것도 없지만 고성능 양수기가 필요하리라 혹은 통닭집 광고전단으로 꼬깃꼬깃 접은 눈 통닭집 전화번호와 가격표를 때 묻은 망막에 도배한 눈 아무것도 먹어보지 못했지만 마냥 토하고 싶은 눈, 그래도 처음엔 봄밤의 사과꽃 속으로 지는 달처럼 아름다운 무늬를 지녔으리라 지금은 딱딱한 딱지 앉은 배꼽 같은 눈, 그리운 탯줄 대신 빨간 고무호스를 달아줄까       < 생에 대한 각서  / 이성복 >   사람 한평생에 칠십 종이 넘는 벌레와 열 마리 이상의 거미를 삼킨다 한다 나도 떨고 있는 별 하나를 뱃속에 삼켰다 하리라  목 없는 무당개구리를 초록 물뱀이 삼켰다 하리라 하지만 나는 생쥐같이 노란 어떤 것이 숙변의 뱃속에서 횟배를 앓게 한다 하리라 여러날 굶은 생쥐가 미끄러운 짬밥통 속에서 엉덩방아 찧다가 끝내 날개를 얻었다 하리라       < 죽음에 대한 각서  / 이성복 >   겨울에 죽은 목단 나무 가지에서 꽃을 꺾었다 끈적한 씨방이 갈라지고 터져 나온 꽃 , 죽은 딸을 흉내내는 실성한 엄마처럼 꽃 떨어진 자리도 꽃을 닮았다 여름 꽃을 보지 못했어도 우리는 겨울이 꽃이 될 수 있다 희뿌옇게 타다 만 배꼽 같은 꽃, 제사상에 올리는 문어 다리 꽃, 철사로 동여매도 아프지는 않을 거다 그 꽃잎 마른 번데기처럼 딱딱하고 , 눈비가 씻어간 고름 자국 찾을 수 없다, 죽음이 불타 버린 꽃       < 조각에서 1 / 이성복 >   파충류의 목을 한 저 여인의 얼굴은 구멍 뚫린 엉덩이에서 똘똘 뭉쳤다가 뒤틀리며 뻗어나가 껍질을 깨고 나온 한 장의 떡잎, 말라붙은 음부와 항문이 진흙에 처발리고 요도의 물줄기도 끊어진 지 오래, 육중하고 무식한 저 골반 속에서 눈 뒤집어진 살인범이 가느다란 실팬티를 걸친 마사지걸을 목조르고, 말고기처럼 늘어진 시신을 전기톱으로 썰어도, 밖에서는 전동칫솔 돌아가는 소리쯤으로 알았을 것이다       < 조각에서 2 / 이성복 >   몇 개의 구멍이 나 있지만 다 가짜다 손가락 집어넣으면 금세 막힌다 그러니까 진짜 구멍을 숨기려는 꼼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보면 부툰 똥배 아래, 수영복 실팬티만 한 음부 한가운데 못에 긁힌 핏자국 같은 구멍은 가짜가 아니다. 거기, 막대기 집어넣고 마구 돌리면 파꽃처럼 꽃핀 머릿속 내용물이 마구 요동치며 딸꾹질하고 허파꽈리 터지는 소리를 내리를 것이다 오직 쾌락을 마시고 무명을 배설하는 이 흉물스런 기계를 어찌할 것인가 퍼질러 앉은 유방이 권투장갑 같은 이 기계가 누가 감히 대적할 것인가         < 앉아 있는 누드  / 이성복>   1 예전엔 정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손은 조용히 입술에 가 닿고 배꼽은 잊혀진 이야기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다시 사이 메마른 음부가 떨고 있지만 아주 큰 슬픔은 슬픔으로 느껴지지도 않아서, 실밥처럼 떨어지는 눈길 하나     2 머릿속에서 흘러나온 옅은 구름이 네 가슴과 배를 감싸고 숨죽일 때 네 허벅지는 어두워지고 싶어 한다   머릿속 덜 빠져나온 구름들 사이로 네 눈길이 고단한 일생을 예감할 때 헐 벗은 아랫도리는 잠시 경련한다     3   네가 네 얼굴을 잠의 신전에 비쳤을 때 음부는 세워진 허벅지 사이 끼어 있었다 퍼져버린 젖가슴도 , 떨구어진 손가락도   수습할 수 없었다 밤이었다는 까닭으로 아, 어쩌면 저렇게 내버려둘 수 있을까, 돼지 껍데기처럼 말라가는 검은 비밀을         < 시창작연습1 / 이성복 >   우리 집 방바닥은 너무 높거나 너무 낮다 너누 높을 때는 아내가 엄마 대신 나를 몹시 때릴 것 같고 너무 낮을 때는 봄 대신 가을이 쳐들어와 내 기쁨 패대기칠 것 같다 나는 우리 집 방바닥이 계단처럼 여러 칸이었으면 좋겠다 첫번째 계단에는 결혼하기 전 알던 여자를 눕히고 그 바로 위 계단에는 그녀가 낳아보지 못한 내아이를 누이고 싶다 눕기 싫다고 아이가 앙탈하면 내가 대신 기저귀 차고 드러눕고 싶다 아니면, 피로에 지친 암캐미처럼 나 혼자라도 알 까고 싶다 그리고 문득 눈 감으면 그 모든 계단들이 부채살처럼 접혀 아무도 내 생각 들여다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 시창작연습 3  / 이성복>   웃으면 눈가에 비닐랩처럼 금이 가는 사람 있었습니다 어릴때 엄마 없이 오빠들이 업어 키웠다는 사람이었습니다 늦은 밤 모임 끝나면 제일 먼저 뛰어나가 흐트러진 신발 돌려놓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먼길 운전해 집에 들어가면 꼭 문자 해주었습니다 선생님, 잘 도착했습니다 오늘 저녁 참 즐거웠지요? 맞은편 아모르 베이커리에도 불이 꺼졌습니다 그 사람, 너무 환한 불빛 속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잠깐 떠올랐다가, 액정화면처럼 지워지는 사람이었습니다       <  뷔히너 문학전집  / 이성복 >   한 번은 뷔히너가 그렇게 읽고 싶었다 그토록 좋아했던 한 문장, " 그는 머리로 걸었다" 뭐 그런 떳의 문장, 오래전에 나는 머리로 걷는 일을 포기했으니까, 그때부터 나는 정말 텅 빈 머릴로 걷게 되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 뷔히너 문학전집 ]이 번역되었다는 걸 알고 , 학교 서점에 주문했더니 절판이었고, 도서관에 마침 책이 있어 얼마나 기뻤던지......구내 복사실에서 복사를 뜨고 원본은 학생들 오면 책 만들어 주라고 놓고 왔다 그리고 며칠 뒤 책꽂이를 닦는데, 아 거기 빨간 껍데기의 [ 뷔히너 문학전집 ] 이 꽂혀있었다 분명 내가 읽고 밑줄 친 흔적까지 있었으니, 십 수 년 전 사놓고 아껴 읽다가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던 참에 복사실에서 전화가 와, 저번에 맡긴 책이 다른 책에 휩쓸려 분실되고 말았으니 어쩌면 좋겠느냐고....내게 마침 원본이 있으니 그걸로 반납하면 된다고 안심시켜 드렸다 그러니까, 텅 빈 머리로 걷다가 내가 가진 원본을 잃어버린것이다       < 그녀에게  / 이성복 >   잘 놀다 가라고 입에 발린 말이라도 했으면 좀 덜 아팠을까 쨍쨍한 하늘에 흰 구름 스쳐가는 것이 마냥 아득하다 싶어도 한숨 곤히 자고 나면 잊힐 줄 알았는데, 미워 한껏 눈 홀기면 순한 눈 껌벅이며 미안해도 할 수 없다는 듯 품안으로 기어들어 밤새 헛소리한다 이처럼 하루 이틀 생짜배기 몸이 아픈 것은 언젠가 내가 저를 몰라봤다는 것, 이젠 저를 달래기도 신물이 나, 덮던 이불 걷어차고 정색을 해도 어쩌든지 한 열흘 쉬어 가겠다는 것, 내 젖은 등에 기대 저 온 길만 바라보며 중얼 거린다: 꽃피는 오월에도 눈이 오려나?